[한경ESG] ESG와 경제
지난 6월 지구 온난화에 따른 극심한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 콜로라도강 유역 후버댐 / 연합뉴스
지난 6월 지구 온난화에 따른 극심한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 콜로라도강 유역 후버댐 / 연합뉴스
스위스의 작은 휴양도시 다보스에서 매년 초에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2015년부터 단골 메뉴로 다루는 유일한 과제가 있다. 바로 ‘디스토피아(dystopia)’다. 미국도 ‘우리 국민, 우리 미래(our people, our future)’라는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에 제시된 미래 어젠다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디스토피아 문제를 거론해 주목을 끌었다.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utopia)의 반대 개념인 반(反)이상향으로 예측할 수 없는 지구상의 가장 어두운, 특히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유토피아〉(1516) 저자 토머스 모어는 인간 현실 세계의 이상향으로 유토피아를 제시했는데, ‘그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란 뜻으로 현실에 없는 이상적인 상(像)을 말한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대표적 문학작품으로는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1945)을 꼽을 수 있다. 〈동물 농장〉은 크게 3가지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극심한 환경문제로 태양이 사라진 지구가 어둠에 휩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돼 치안과 시스템이 무너진다. 그리고 대도시와 위생 환경이 사람보다 쥐에 익숙하도록 변한다는 것이 골자다.

올해는 유난히 디스토피아 현상이 심하다. 북미 지역은 폭염, 중남미 지역은 대가뭄, 아시아 지역은 태풍, 유럽 지역은 대홍수, 아프리카 지역은 사막화, 오세아니아 지역은 강한 바람에 편승한 쥐 떼 등으로 전 세계가 홍역을 앓고 있다. 엄격히 따지면, 지난 1년 반 이상 동안 전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도 디스토피아다.

WEF, 28개 디스토피아 과제 발표

WEF는 앞으로 10년 동안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위험 요인으로 경제·환경·지정학·사회·기술 등 5개 분야에 걸쳐 총 28개의 디스토피아 과제를 발표했다. 28개 디스토피아 과제를 발생 가능성과 파급력 등의 기준으로 각각 순위를 매긴 점이 특징이다. 각국 정책 당국자와 기업인, 그리고 개인이 쉽게 대응할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도 역력하다.

발생 가능성이 가장 높은 위험 요인은 국가 간 분쟁이다. 발생할 경우 파급력이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수자원 위기(사회 위험)로 꼽았다. 발생 가능성이 가장 높은 5가지 위험은 ① 국가 간 분쟁 ② 극단적 기상이변 ③ 사이버테러 ④ 국가 거버넌스 실패 ⑤ 높은 구조적 실업과 불완전 고용이다. 발생 시 파급력이 가장 크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5가지 위험은 ① 수자원 위기 ② 급속한 전염병 확산 ③ 대량 살상무기 ④ 국가 간 분쟁 ⑤ 기후변화 대응 실패 순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30년이 넘은 시점에서도 국가 간 분쟁 등 지정학적 위험이 최상위권으로 진입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글로벌화에 대한 환멸은 국가 거버넌스 실패, 국가 간 분쟁, 대규모 사이버테러 공격, 국가 붕괴 위기, 대량 살상 무기 등으로 촉발된 국민 감정과 함께 각국의 이기주의와 군축 경쟁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위험은 사이버테러 공격 등 기술적 위험의 대두와 새로운 경제 환경의 영향으로 종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지적한 점도 눈에 들어온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선진국과 신흥국 가릴 것 없이 경제성장과 고용 창출이 이전만큼 회복되지 않음에 따라 앞으로는 국가주의의 동인이 강화돼 국가 간 혹은 국가 내 갈등을 더욱 조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연재해, 국제분쟁, 사이버테러 등을 지적한 다른 국가와 달리 한국에 대해 특별히 실업에 따른 디스토피아를 지적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술적 위험의 경우 대규모 사이버 공격은 파급력과 발생 가능성 면에서 해가 지날수록 상위권으로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기술은 혁신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을 발생시키기에 인터넷과 SNS 환경은 해킹, 정보 유출 등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IoT 등의 기술은 비즈니스 모델과 사업 환경에 큰 혁신을 가져왔지만, 노동시장의 대규모 파괴 등 잠재적 시스템 위험도 함께 높아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교토의정서 등을 통해 각국이 노력해왔지만 뚜렷한 성과와 대응책 마련이 없어 환경 디스토피아가 날로 높아지는 추세다. 2020년대 들어 파급력이 가장 큰 환경적 디스토피아로 수자원 위기, 기후변화 대응 실패, 생물학적 다양성 손실과 생태계 붕괴 등이 꼽히고 있다. 식량 자원, 수자원, 에너지, 기후변화 등을 미국 국가정보회의(National Intelligence Council, NIC)에서 2030년 가장 중요한 메가트렌드로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0년대 들어 환경 디스토피아 부상

사회적 위험의 경우 경제적·사회적·환경적 발전으로 인해 시스템상 취약성이 높아진 점을 우려한 것도 주목된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국가 간에는 차이가 좁혀지고 있지만, 국가 내에서는 높아지는 것이 사회적 디스토피아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는 지적이다. 특히 개도국에서는 빠른 기술 변화로 만성적 대규모 실업을 발생시킬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방치할 경우 ‘아랍의 봄(arab spring)’과 같은 폭동 사태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적 불평등과 실업은 사회적 안정을 저해하고 평등과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 고리가 형성돼 사회적 위험에 대한 논의와 해결책 마련을 어렵게 한다. 이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은 안정감을 찾기 위해 국가 전체에 속하기보다는 심리적 소속감과 동료 의식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은 집단, 즉 다양한 커뮤니티에 속하려는 경향이 높아지는 점도 사회적 디스토피아 해결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공공 부문의 과다 부채와 고용 문제로 세계경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세계적 실업 문제가 개선되기보다 오히려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높은 실업은 임금 수준을 낮게 유지해 저물가 압력을 유발하고, 저물가는 채무자의 채무 상환 능력을 떨어뜨려 금융 시스템 안정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디스토피아 시대에서는 종전의 규범과 제도보다 정의와 도덕 같은 이른바 행동주의 가치와 기본(back to the principle)이 중시될 가능성이 높다. 디스토피아, 그 자체가 불확실성을 내포해 위험이 상수항(함수 y=a+bx에서 ‘a’)이 되는 시대에 모든 경제 주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ESG’가 최고 덕목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 어느 주체보다 먼저 대응해야 할 기업들은 ESG 체제를 하루빨리 구축해야 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