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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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난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 업체들이 기록한 점유율이다. ‘반도체 종주국’이란 수식어, 인텔 엔비디아 퀄컴 AMD로 이어지는 화려한 라인업에 비해 초라한 숫자다. 최근 미국은 정부와 의회, 반도체기업이 ‘삼각편대’를 이뤄 함께 움직이고 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제조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시장 지배력을 높이겠다는 포석이다.

한국 기업들은 긴장 상태다. 정부 지원을 업은 미국 기업들이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점유율 싸움을 걸어오면 한국 기업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WD·키오시아 20년 전부터 ‘끈끈’

이번 전장은 낸드플래시다. 업계 3위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이 2위인 일본 키오시아 인수를 준비 중이다. 26일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기준 낸드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33.5%로 1위다. 지난해 M&A를 선언한 SK하이닉스와 인텔의 점유율 합계는 19.8%다. 한국 기업들이 낸드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게 됐다는 의미다.
바이든 지원 업은 美반도체, 글로벌 기업 '표적 사냥' 시작됐다
업계에서는 WD가 한국을 중심으로 재편 중인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생존을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고 평가한다. 낸드는 D램에 비해 기술장벽이 낮고 비슷한 수준의 5~6개 업체가 난립해 있다. ‘치킨게임(경쟁자를 퇴출시키기 위해 벌이는 저가 물량 공세)’이 벌어질 정도로 경쟁도 치열하다. 한국의 ‘빅2’를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 WD와 키오시아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WD와 키오시아의 관계는 ‘밀월’로 불릴 정도로 끈끈하다. WD가 키오시아의 주요 고객사이던 샌디스크를 인수한 2000년, 두 업체는 기술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돈독한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2019년 일본 공장 공동 투자에 나섰고 지난 2월엔 162단 3D 낸드를 공동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0.1%포인트 차로 위태로운 1위

지난해까지만 해도 낸드업계에선 기업 간 합병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시장 참여자가 줄어들면 경쟁 강도가 약해질 것이란 논리였다. 하지만 WD의 키오시아 인수와 관련해선 완전히 다른 해석이 나온다. 국가 간 반도체 패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슈퍼파워’로 불리는 미국의 반도체기업이 세계 1위로 올라설 수 있어서다. 올 1분기 기준 WD와 키오시아의 점유율 합계는 33.4%로 세계 1위 삼성전자와의 격차는 0.1%포인트에 불과하다.

낸드업계가 2강(삼성전자, WD+키오시아), 2중(SK하이닉스+인텔, 마이크론) 체제로 바뀌면 본격적인 진검승부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미국 정부의 움직임이다. 지원 법안 등을 내걸고 반도체 생태계에 적극 개입하면 WD의 시장 지배력이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키오시아는 낸드의 원조로 모든 원천기술과 특허를 다 갖고 있다”며 “WD의 키오시아 인수는 한국 기업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기업 ‘실력 행사’ 본격화 전망

WD의 키오시아 인수 추진이 ‘빙산의 일각’이란 평가도 나온다. ‘반도체 제국’으로 불리는 인텔은 지난 3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사업 진출을 선언했고 세계 4위 파운드리업체 글로벌파운드리 인수를 시도했다. 팻 겔싱어 인텔 대표(CEO)는 “앞으로 M&A는 인텔이 주도할 것”이라며 몸집 불리기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계 2위 아날로그 반도체업체인 미국 아날로그디바이시스는 ‘규모의 경제’ 달성을 위해 추진한 동종업계 경쟁사 맥심 인수를 마무리지었다. 지난 25일 중국 경쟁당국인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이 M&A를 승인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설계·판매 세계 1위 미국 엔비디아는 영국 ARM 인수를 추진 중이다.

모든 반도체사업 영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삼성전자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올초 최고재무책임자(CFO)가 ‘3년 내 M&A’를 약속했지만 주요 반도체기업의 시가총액이 급증한 것이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 외신들은 유력한 매물로 꼽히던 네덜란드 NXP의 가격이 올라 삼성의 M&A가 물 건너갔다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이수빈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