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서원대 교수
김병희 서원대 교수
“죄송합니다.”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송구한 말씀 올립니다.”

우리나라에서 보통의 사과문이나 사과 광고에 가장 자주 쓰이는 표현들이다.

튀지 않는 무난한 내용이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기에, 저토록 맹숭맹숭한 표현만 나올 터.

사과문이란 실수나 잘못에 대하여 사과하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이므로, 거의 모든 사과문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는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사과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거쳐야할 절차라면 조금 재미있게 사과문을 작성해보면 어떨까?

2018년 2월, 영국 각지에 있는 KFC 레스토랑 870여 곳은 임시 휴업을 했다. 배송업체로 새로 선정된 DHL에서 닭고기를 제때 공급하지 못해 치킨을 튀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 휴업을 한다는 입소문이 나자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업체인 KFC의 브랜드 평판이 급속히 나빠졌다. 그러자 KFC는 영국의 주요 신문에 사과 광고를 냈다. 발 빠른 대응이었다.

영국 KFC의 광고 ‘사과문’ 편(2018)을 보면 치킨 담는 버킷(통이나 바구니)의 앞쪽 표면에 “FCK”라고 표기한 사진이 한눈에 들어온다.

KFC 로고 대신에 욕설을 연상시키는 ‘FCK’라는 알파벳을 넣었다. KFC에서 앞의 케이(K)를 맨 뒤로 보내고 기존의 로고 형태를 그대로 유지해 KFC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음식 부스러기가 흩어져있는 배경이 빨강색이라 버킷에 쓰인 글자가 더 돋보인다. 치킨 담는 버킷에는 “FCK”라고 쓰여 있지만 ‘퍽(Fuck)’으로 읽기 딱 좋다.
영국 KFC의 ‘사과문’ 편 (2018)
영국 KFC의 ‘사과문’ 편 (2018)
버킷에 KFC 대신 FCK로 바꾼 데는 고객들의 불만을 반영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영어에서 ‘퍽’은 욕할 때 자주 쓴다.

“엿 먹어라(Fuck you)!”가 대표적이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나 불쾌할 때도 자주 쓴다. 남에게 쓰면 욕설이 되지만 혼잣말로 하면 자책의 뜻이다.

“왓 더 퍽(What the Fuck!)”을 혼잣말로 하면 ‘젠장!’ 혹은 ‘빌어먹을’ 정도가 될 것. 광고회사 마더 런던(Mother London)의 창작자들은 욕설이지만 자책의 뜻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알파벳 세 글자를 재배열해 사과하는 심경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보디카피는 이렇다.

“치킨 없는 치킨 레스토랑. 바람직하지 않죠. 고객 여러분 모두와 매장이 닫혔는데도 멀리서 찾아오신 고객님들께 특히 더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상황을 개선하려고 부단히 애써온 KFC 직원들과 가맹점 파트너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지옥 같은 일주일 동안 개선하고 노력한 결과, 더 신선한 닭고기가 저희 레스토랑에 매일매일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견뎌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보디카피 아래쪽에 웹사이트 주소를 남겨 매장별 영업 일정도 알 수 있게 했다.

광고에서는 소비자에게 사과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런데 보통의 사과 광고와 다르다. 소비자를 웃게 하는 유머 코드가 담겼다.

광고에서 비속어를 쓰면 종종 곤란한 경우가 발생하는데, 여기에서는 “퍽(F*CK)”이란 비속어를 연상하게 하면서 매장 휴업에 대해 사과했다.

위기 상황에서 이처럼 능숙하게 대처하기도 어려운 법.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유쾌한 사과문이자 위기관리의 달인이 만든 놀라운 솜씨다.

이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의 스티커 메시지는 사과 메시지의 놀라움(Interesting)이다.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사과 광고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브랜드 이름을 살짝 뒤틀어 치킨이 없어 엉망진창이 돼버린 일주일을 적나라하게 묘사했고, 비속어 금지라는 금기를 깨면서 자조적인 유머 코드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냉동 치킨을 쓰리라고 생각했던 KFC가 신선한 닭고기를 매일 공급받는다는 사실도 이 광고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소비자들은 환호했다.

브랜드 평판의 추락을 방지하고자 시도한 광고에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성과였다. 이 광고는 크리에이티브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점을 인정받아, 2018년 칸라이언즈 국제광고제에서 인쇄 및 출판 부문의 금상을 수상했다.

사과 광고가 성공한 핵심 요인은 무엇일까? “죄송합니다”,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송구한 말씀 올립니다” 같은 영혼 없는 사과에서 벗어나, 사과의 메시지에 재미 요소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블로그나 소셜미디어를 주요 매체로 활용하지 않고, 전통 매체인 신문에 먼저 광고를 하고 온라인 사이트로 유도한 전략도 주효했다. 위트 있는 내용을 무게감 있는 신문 매체를 통해 전달한 것이 오히려 유머 효과를 배가시켰다.

“사과는 자신감 넘치는 리더십의 표상이다.” 사과의 전문가인 존 케이도(John Kador)의 말이다.

사과도 자신감이 있어야 기꺼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과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거나 어떤 전제를 깔고 조건부로 사과하는 것은 사과를 안 하느니보다 못하다. 한 마디의 사과가 백 마디의 설득을 이긴다고 했다.

경영자든 정치인이든 사과를 하려거든 유쾌하게 사과해야 한다. 사과하는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죄 많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도 있다.

사과를 하려거든 좀 더 쿨하고 재미있게 사과하면 좋겠다. 사과문을 낸다고 해서 잘못이 사라지지 않고, 사과문을 안 낸다고 해서 잘못이 가중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기왕 사과문을 낼 바에는 기억에 남을 창의적인 사과문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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