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대주주 지분 매각 올 상반기 36건 '최대'

마땅한 후계가 없다
유학파 외동딸·공학박사 아들…
기업경영 적성 안맞아 '손사래'
공학박사 출신인 아들은 경영권 승계를 거부하고 정보기술(IT) 분야에 뛰어들었다. 현직 의사인 딸도 회사 지분 대신 현금 증여를 원하고 있다. 최근 국내 대형 회계법인에 기업 매각을 의뢰한 한 중견기업의 사례다. 최근 2~3년 사이 이처럼 승계 실패에 따른 기업 매물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는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경영권 승계' 관심 없는 2·3세들…업종 1위 기업까지 매물로

국내 가구 1위인 한샘, 1세대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 등이 올해 승계 대신 지분 매각을 택한 대표적 사례다. 업력이 40년에 달하는 대구·경북 기반 MS저축은행도 상속세 부담 등이 겹치자 2세에게 물려주는 대신 SK증권에 팔았다. 크린토피아, 태화기업, 승명실업, 태림포장, 제이제이툴스, 이지웰, 성원산업 등 최근 5년 동안 개인 대주주가 경영권을 매각하거나 추진한 사례는 총 181건에 달했다.
‘지방 공장’ 경영 꺼리는 2세 늘어
최근 인수합병(M&A) 시장에 주류로 등장하는 매물은 대부분 1970~1990년대 창업한 제조·서비스업체다. 한 대형 회계법인의 M&A 담당 변호사는 “60대 이상 창업주들이 회사를 매각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승계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점 때문”이라며 “물려줄 만한 자식이 없든가, 있어도 회사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능력이 모자란 경우”라고 말했다.

또 다른 회계법인 관계자는 “과거 조선, 해운, 자동차 부품 등에 치중된 국내 주력 업종이 최근 IT, 플랫폼, 서비스 등으로 바뀌었다”며 “자녀들에게 근면 성실하게 제조공장을 운영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한 사모펀드(PEF) 대표는 “창업주의 자녀가 해외에서 유학한 뒤 외국계 기업과 스타트업 등에서 근무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제조업 경영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말했다. 최근 매각된 한 금형업체는 공장이 있는 지방에서 자녀를 교육시킬 수 없다는 며느리의 반대로 아들의 승계가 무산되기도 했다. 매각 대금으로 편의점을 차려달라는 아들의 요청 때문에 회사를 판 사례도 있다.

과거와 달리 창업주들 사이에 ‘능력 없는 자녀’에겐 물려주지 않는다는 인식도 확산됐다. 중견 제조업체 A사의 사장은 아들의 경영능력이 기대에 못 미치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팔았다. 70대 창업주가 일군 B사는 50대 자녀들의 승계 다툼이 심해지자 돌연 매각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했다.

상속세 부담도 중견기업 매각을 부채질하는 요소로 꼽힌다. 국내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지만 최대주주 지분으로 주면 60%에 육박한다. 한 중소기업 유관단체 관계자는 “가업승계 공제나 과세특례 제도가 있지만 고용 유지 등의 조건이 달려 있다 보니 2세들도 ‘현금 증여’를 선호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승계보단 현금 보유 ‘선호’
이 같은 매물의 상당수는 PEF가 채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PEF는 총 855개, 투자자가 PEF에 출자를 약정한 금액은 97조1000억원으로 모두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경영권을 매각해 회사가 성장한 전례가 늘어나면서 대주주와 임직원들의 PEF에 대한 거부감이 예전처럼 크지 않은 상황이다. 신규 PEF가 계속 늘어나면서 “좋은 값에 회사를 사겠다”는 제안도 많아졌다. PEF들도 가격이 치솟을 수 있는 공개 경쟁입찰보단 대주주와의 수의계약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물 밑에서 꾸준히 딜이 성사되는 이유다.

M&A업계에선 ‘대목’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중개 수수료를 주요 수익원으로 하는 투자은행(IB)과 회계법인, 법률법인 등은 더 분주해졌다. 대형병원의 인맥을 총동원해 알짜기업 오너 일가의 건강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거나 주요 임직원에게 접촉해 오너 일가의 불화를 찾아내는 등 기회 포착을 위한 물밑 경쟁도 치열하다. 대형 회계법인 중에는 지방의 작은 회계법인과 사전에 친분을 쌓은 뒤 그 지역의 알짜 중소·중견 기업 경영인들의 속사정을 수집하는 사례도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제조업체의 경영 체질을 개선하고 미래 먹거리를 찾는다는 측면에선 PEF가 인수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며 “경영 일선에 남아 조언을 한다는 조건으로 회사를 매각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민지혜/차준호 기자 sp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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