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 분당구 백현동 크래프톤타워 로비. /사진=한경닷컴
경기 성남 분당구 백현동 크래프톤타워 로비. /사진=한경닷컴
크래프톤의 수요예측 마감일이었던 지난 달 27일 오전, 투자은행(IB)과 기관투자자들 사이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크래프톤의 기관 청약이 펑크났다", "공모가가 희망공모가 범위 밑으로 떨어지게 됐다"는 루머가 시장에 돌았고, 청약 참여를 준비하던 기관들은 "사실이냐"는 문의가 속출했다. 기관 청약 열기는 급격히 식었다.

안그래도 막대한 공모 규모 때문에 높은 경쟁률을 바라기 힘든 상황에서 청약이 주춤하자 상장 주관을 맡은 증권사들은 비상이 걸렸다. 기관 영업 담당자들에겐 긴급 '미션'이 떨어졌다. 어떻게든 기관에 최대한 많은 주문을 받아내라는 것이다. 이날 오후 주관사단은 국내 기관들에게 전화를 돌려 신청 수량을 늘리고 공모가를 높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인수 여력을 초과하는 물량을 떠안을 수 없었던 기관들은 쉽사리 동참하지 못했다. 올해 공모기업 중 가장 낮은 243 대 1의 경쟁률을 받아든 배경이다.

헤프닝 끝에 크래프톤은 희망 공모가 최상단에 공모가를 결정지으며 숨을 돌리게 됐다. 사실 크래프톤은 해외 로드쇼에 나설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과 싱가포르투자청(GIC) 등 주요 공모주 시장의 '1군' 투자자들은 일찌감치 참여를 결정했다. 하지만 국내 기관 청약에서 예상치 못한 경쟁률 저하로 하마터면 흥행 실패를 겪을 뻔 한 것이다.

문제는 한국의 특이한 수요예측 방식에서 비롯됐다. 수요예측이란 말 그대로 공모주를 사고 싶어하는 기관들의 수요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는 절차다. 기관들이 희망공모가격 범위 내에서 원하는 가격과 수량의 적어내면 이를 기반으로 공모가를 결정하고 주식을 배분한다. 해외에서는 이를 '북빌딩(book building)'이라고 한다. 장부를 차곡 차곡 쌓는다는 뜻이다.

해외에서는 기관 투자가들을 돌면서 기업설명회를 하는 '로드쇼'를 한 뒤 짧게는 2주에서 한 달 간 수요예측을 진행한다. 그만큼 해당 기업의 현주소와 성장성을 꼼꼼히 챙겨볼 수 있다. 그렇게 자신들이 평가한 기업가치를 바탕으로 가격을 제시하고 원하는 수량만큼 주식을 받아간다. 기관에게 배정된 물량이 다 소진되면 비로소 수요예측이 마감된다. 경쟁률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기관들이 참여하지 않을 경우 상장이 무산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이틀 동안 수요예측을 실시한다. 단 기간 진행되기 때문에 가격 결정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회사가 희망공모가격을 제시한다. 그러면 기관은 그 범위 내에서 가격을 써낸다. 공모주 열풍으로 최근들어 희망가격보다 가격이 상향 조정되는 사례가 많지만, 예전에는 처음 제시한 가격 범위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요식행위'인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수요예측을 진행하면 장점이 있다. 일단 빠른 시간 내 공모 절차를 마칠 수 있다. 회사가 원하는 가격을 받을 가능성도 커진다. 가격범위를 제한해두기 때문에 회사와 투자자는 공모가가 널뛰기할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단점도 적지 않다. 이틀 동안 약 2000개의 기관들로부터 한꺼번에 주문이 몰리다보니 경쟁이 치열해진다. 경쟁률이 1000 대 1이라면 1000주를 신청해야 1주를 받는다. 이 때문에 기관들은 자금 여력 이상으로 주문을 넣는다. 공모주를 많이 받기 위해선 공모가도 높게 써내야 한다. 너도나도 이렇게 하다보면 '오버베팅'이 관례처럼 굳어지게 된다. 단기간에 진행하다보니 냉정하게 기업 가치를 평가하기 보다는 수급을 놓고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다. 하반기 최대 공모주라는 크래프톤이 시장 분위기에 휘청인 이유다.

단순 숫자만 놓고 보면 크래프톤의 수요예측은 흥행했다고 보기 어렵다. 단순 경쟁률로 비교했을 때 올 상반기 가장 낮은 경쟁률을 기록한 유산균 제조업체 HPO(252 대 1)보다도 저조하기 때문이다. 이달 초 상장한 SD바이오센서(1144 대 1)를 비롯해 카카오뱅크(1733 대 1), HK이노엔(1871 대 1) 등 대어들은 모두 1000 대 1을 훌쩍 넘겼다. 기관들이 카카오뱅크에 써낸 주문금액인 2585조원을 써냈다면 크래프톤의 수요예측 경쟁률은 1090 대 1에 달했을 것이다. 실제 크래프톤의 주문금액은 576조원 어치로 카카오뱅크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후 맥락과 기관들의 신청 내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신청수량의 81.7%가 공모가 상단인 49만8000원 이상을 써냈다는 점에서다. 상단을 넘어선 가격을 제시한 비중도 24.2%에 달했다. 최하단인 40만원을 제시한 주문량은 전체의 4.2%에 불과했다. 공모가 상단에 주식을 받아갈 기관들이 원하는 수량만큼만 신청한 것이다. 이는 '뻥튀기'가 아닌 실수요자들로만 구성된 숫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데로 해외 기관 로드쇼를 진행할 당시 반응도 뜨거웠다. 처음에 제시했던 공모가격인 55만7000원보다 높은 가격을 부른 기관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크래프톤이 공모가에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게 된 이유다. 해외 큰 손 투자자들의 '러브콜'이 쏟아지는데, 굳이 가격을 낮출 필요는 없다는 게 회사 측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크래프톤의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해외에서 상장했더라면 공모가도, 수요예측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이제와서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크래프톤은 글로벌 기업일지라도 한국의 자본시장은 글로벌 수준에 올라서지 못했다. 크래프톤에게 남은 숙제는 국내 기관들이 틀렸다는 것을 주가로 증명하는 것 뿐이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