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 33년 초격차…기업 경영에 주는 메시지

최강자지만 사소한 데이터도 과학적 매뉴얼로 축적
경기장 리스크 대비해 사진기자 셔터 듣는 훈련까지

양궁 대표 '700쪽 매뉴얼'엔…병원 번호부터 선배들 노하우까지
한국 양궁 올림픽선수단이 2020 도쿄올림픽에서 남녀 단체전, 혼성전 금메달을 휩쓸며 세계 최강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안산(20), 강채영(25), 장민희(22), 김제덕(17), 김우진(27),오진혁(40). 연합뉴스

한국 양궁 올림픽선수단이 2020 도쿄올림픽에서 남녀 단체전, 혼성전 금메달을 휩쓸며 세계 최강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안산(20), 강채영(25), 장민희(22), 김제덕(17), 김우진(27),오진혁(40). 연합뉴스

33년간 올림픽 여자 단체전 9연패(連覇), 남자 단체전 2회 연속 우승. 한국 양궁의 창대한 영광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1959년 수도여고 체육교사로 재직하던 고(故) 석봉근 대한양궁협회 고문이 청계천에서 줄 없는 중고 활대를 구입해 연습한 게 시초였다.

디테일·위기대응·신기술…양궁서 배워라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이 선도하던 세계 무대에서 한국은 비주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한국 양궁은 압도적인 세계 1위로 뛰어올라 수십 년간 정상을 굳게 지켰다. 중국 독일 러시아 등 스포츠 강국의 도전을 모두 뿌리치고 초격자를 벌린 양궁의 쾌거는 세계 무대에서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는 우리 기업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뛰어난 선수들의 공정한 경쟁이 한국 양궁의 압도적 위상을 이룩했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장기 집권’하는 비결을 설명하기 어렵다. 핵심은 ‘이기는 습관’을 시스템으로 구축한 데 있다. 철저한 준비와 점검, 리스크 관리, 튼튼한 인프라와 독보적 기술력 확보, 공정한 경쟁과 선발 등의 토털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한 결과다.

그중 첫 번째가 철저한 디테일이다. 대한양궁협회가 발행하는 ‘국가대표팀 운영 매뉴얼’은 분량이 700쪽을 넘는다. 여기엔 선수들이 선수촌에 소집된 첫날 입어야 할 복장, 신체검사를 위한 병원 예약 전화번호를 비롯해 지도자와 선수가 숙지해야 할 모든 정보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 매뉴얼 곳곳에는 과거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겪은 어려움과 새로 터득한 노하우 등 ‘암묵지’에 가까운 정보도 녹아 있다. 선배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경기 전략도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마련된다. 국제대회를 마칠 때마다 감독들이 작성하는 보고서에는 한국 선수와 상대 팀의 경기 기록부터 국가별 종합 전력 분석 등이 모두 적혀 있다. 특정 팀을 상대로 몇 점을 득점해야 승리 확률이 높아지는지에 대한 통계학적 분석까지 포함돼 있다. 선수 선발과 전략 수립에 비합리성이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카메라 셔터 소음에도 만점 슛
디테일·위기대응·신기술…양궁서 배워라

양궁협회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과 전략에 안주하지 않고 실전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에 철저히 대비했다. 지난 5월에는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일본 유메노시마 양궁장의 환경과 비슷한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 선수들을 투입했다. 유메노시마의 강한 바닷바람에 대표팀을 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언론 대응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 현직 작가를 동원한 모의 인터뷰, 사진기자들의 셔터 소리에 적응하는 훈련도 했다. 지난해엔 미얀마 양곤으로 전지 훈련도 다녀왔다. 7월 도쿄의 무더위에 선수들을 적응시키기 위해서다.

훈련은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선수 중 상당수는 예상보다 큰 카메라 셔터 소리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 대회보다 포토라인이 사로(射路)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3일 랭킹라운드에서 한국 선수들은 포토라인과 가까운 가장 오른쪽에서 경기를 치르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른쪽에 섰던 안산은 사진 기자들과 불과 3~4m 거리에서 셔터 소리를 들으며 연달아 10점을 쐈다.
현대차, 37년간 500억 투자
양궁협회가 철저히 선수 지원에만 집중할 수 있는 토대는 튼튼한 자금력에 있다. 다른 종목별 경기단체와 달리 양궁협회에서 비리와 사건·사고 등 잡음이 불거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체육계 관계자는 “자금 확보가 어려운 다른 협회들은 후원자를 유치하고 돈을 버는 과정에서 유착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양궁협회는 예외”라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은 1985년 정몽구 명예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한 이후 37년간 양궁 인재 발굴과 첨단 장비 개발 등에 약 500억원을 투자했다. 2005년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은 정의선 회장은 2016년 국내 최대 규모의 ‘현대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를 신설하는 등 양궁의 저변을 크게 넓혔다. 그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정 회장이 한국 선수 전용 휴게 공간을 양궁 경기장 옆에 만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후원자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협회와 선수, 감독은 하나로 뭉쳐 경기력 향상이라는 목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국가대표 선발 땐 짬짜미 원천봉쇄
협회는 이전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신궁’들도 선발전 성적이 나쁘면 가차 없이 떨어뜨렸다. 2016년 리우올림픽 2관왕에 올랐던 장혜진도 2차 선발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서는 막판 ‘짬짜미’가 벌어질 가능성을 막기 위해 같은 팀 선수끼리 첫 경기에 대결하도록 대진을 짰다. 선발전 포인트 산정 방식은 공정을 기하기 위해 난수표처럼 복잡하게 구성했다. 지난해 3월 협회는 코로나19로 도쿄올림픽이 1년 연기되자 2021년도 대표를 새로 뽑아 도쿄에 보내기로 했다.

2020년 대표 선발전에서 어깨 부상으로 포기했던 김제덕은 협회의 방침 덕분에 다시 기회를 잡아 금메달을 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기술력 자랑하는 국산 활
도쿄올림픽에서 양궁 여자단체 9연패 위업을 세운 강채영·장민희·안산 선수는 ‘WIAWIS(위아위스)’란 브랜드가 적힌 활을 사용했다. 양궁 2관왕을 차지한 김제덕 선수도 위아위스의 활시위를 당겼다. 위아위스는 국내 중소기업 윈앤윈의 브랜드 이름이다.

윈앤윈은 세계 양궁장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토종 기업이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박경래 윈앤윈 대표가 1993년 설립했다. 박 대표는 “당시 미국과 일본산 활이 세계 시장을 장악했지만 단점이 있었다”며 “선수들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제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독자적인 개발에 나섰다”고 말했다.

윈앤윈의 활은 가볍고 탄력성이 뛰어난 ‘나노카본’ 소재로 제작됐다. 타사 제품에 비해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고, 탄착군을 정확하게 형성해 양궁 선수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각국 양궁 대표팀의 약 40%가 윈앤윈의 활을 사용하고 있다. 경쟁사인 미국 호이트 제품과 엇비슷한 시장 점유율이다. 박 대표는 “최상의 품질을 얻기 위해 매년 매출의 20~30%를 연구개발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성수영/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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