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서원대 교수
김병희 서원대 교수
한 시간을 마주앉아 대화를 나눴는데도 상대방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애매할 때가 있다.

경영자의 긴 연설을 들었는데도 장밋빛 청사진만 나열한 탓에 뭘 하라는 건지 알쏭달쏭한 경우도 있다.

애매한 말을 자주 하는 사람으로는 정치인들이 으뜸이다.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도록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둬야 하니까.

하지만 추상적인 말이나 글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 모호한 의사소통은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형성하기 어렵다. 추상성보다 구체성이 중요한 이유다.

올드타이머 레스토랑의 옥외광고 ‘터널’ 편(2013)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올드타이머(Oldtimer)는 오스트리아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레스토랑 체인점이다.

터널을 통과하는 사람이라면 이 광고를 결코 피해갈 수 없을 터. 운전자들은 터널 입구에서 자연스럽게 광고 속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운전자들은 터널 입구에서 광고 속을 통과하거나 여성의 입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먹을 수 있는 모든 것. 휴게소. 올드타이머(All you can eat. Rest stop. Oldtimer).”

여성의 이마에 붙어있는 카피를 보고 나면 터널을 빠져나가는 순간 휴게소에 잠깐이라도 들르고 싶어질 것 같다.

시장기를 느끼는 운전자들도 터널 입구의 옥외광고 메시지를 결코 놓칠 수 없으리라. 차량들이 여성의 입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광고 메시지는 매우 구체적이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레스토랑에 잠시 들르게끔 유도하는 것이 이 광고의 목표다. 광고 목표를 어렵게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솝 우화처럼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표현했다.

구체적이기 때문에 쉽고 그래서 더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애매하지 않고 구체적인 메시지에서 진정성이 더 느껴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드타이머 레스토랑의 옥외광고 ‘터널’ 편 (2013)
올드타이머 레스토랑의 옥외광고 ‘터널’ 편 (2013)
뷔르템베르크금속회사 더블유엠에프(WMF)의 인쇄광고 ‘당근’ 편(2005)에서는 예리한 칼날을 강조했다.

칼로 당근을 썰었더니 도마까지 잘려 나가 버렸다. 놀라운 반전이다.

뷔르템베르크금속회사(Württembergische Metallwarenfabrik)는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53년에 설립된 독일의 프리미엄 주방용품 제조업체다.

이 회사는 1927년에 녹슬지 않는 강철인 크로마간을 개발해서 유명해졌는데, 더블유엠에프(WMF)는 이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통칭하는 브랜드 이름이다.

“생각보다 날카롭습니다. 다마스틸 칼날이 있는 WMF 그랑 구르메 칼(Sharper than you think. The WMF Grand Gourmet knife with Damasteel blade).”

카피에서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강조했다. 보통의 칼날은 절단면에 닿는 칼날 각도가 20도지만 다마스틸 칼날은 15도라 더 날카로운 절삭력을 자랑한다.

광고에서는 당근과 나무 도마를 얇게 썰어 나란히 배열함으로써 날카로운 칼의 인상을 더 강력하게 보여주었다.

부엌에서 물건을 자르면 절단면이 깔끔하게 잘리지 않고 너덜너덜해지는 경우도 있다. 광고에서는 이런 사실을 은근히 환기하면서 나무 도마까지 직선 절단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깨끗한 절단면은 주방용 칼의 예리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 칼을 쓰면 쉽게 자를 수 있다는 보증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도마까지 잘라질 수 있다는 과장법을 활용해 시각 효과를 한껏 부각시켰다.
뷔르템베르크금속회사 WMF의 광고 ‘당근’ 편(2005)
뷔르템베르크금속회사 WMF의 광고 ‘당근’ 편(2005)
두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의 스티커 메시지는 구체성(Concreteness)이다.

구체성(具體性)이란 어떤 것이 뚜렷한 실체를 갖추고 있거나 내용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성질이다.

결국 인간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광고는 물론 보통의 의사소통에서 메시지를 뚜렷하게 전달하게 하는 저력은 구체성에서 나온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남북전쟁 당시 게티즈버그 전투의 전사자를 추모하는 연설이었다.

당대 최고의 웅변가이자 하버드대 총장이었던 에드워드 에버렛은 2시간의 행사에서 1시간 동안이나 연설을 했다.

그는 링컨에 앞서 긴 연설을 했지만 사람들은 링컨의 3분 연설만 기억했다. 링컨의 연설이 지금까지도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손에 잡히는 구체성 때문이다.

구체성이 담긴 말이나 글에서는 진정한 마음이 전해진다. 언제 밥 한번 먹자고 말하지 말라. 이번 수요일 저녁 6시에 밥 한번 먹자고 말하자.

기업의 경영자가 사원들에게 연설할 때도 일하기 좋은 기업 문화를 만들겠노라고 말하지 말라. 사무실 의자를 더 편한 것으로 바꿔주겠다고 말하라.

정치인들도 세계적인 선도국가를 만들겠다며 큰소리치지 말라. 차라리 국가 청렴도 지수(부패 인식 지수의 반대 개념)를 세계 몇 위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라.

대학 총장들도 고속도로 주변에 늘어선 야립광고의 카피부터 바꾸라. 하나같이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는 대학이라니?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기업 경영에 이르기까지 애매한 추상성을 걷어내야 한다. 구체성이 신뢰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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