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노조가 8일 울산 본사의 턴오버 크레인을 점거하고, 주변 도로에 수백 대의 오토바이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채 집회를 열고 있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8일 울산 본사의 턴오버 크레인을 점거하고, 주변 도로에 수백 대의 오토바이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채 집회를 열고 있다.
2019년 5월 27일 울산 동구 한마음회관.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앞서 현대중공업 물적분할을 의결하기 위한 주주총회가 나흘 뒤인 31일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분할에 반대하던 노동조합은 이날부터 회관을 닷새간 무단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시설이 파손되고 일부 직원들이 노조원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사측은 주총 장소를 울산대 체육관으로 옮긴 뒤에야 법인분할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어 회사 관리자 등을 폭행한 조합원 4명을 해고하고, 1400여 명에게 징계 조치를 내렸다. 노조는 반발하며 파업을 선언했다. 2019년과 지난해 임금 및 단체협상 타결에 실패한 데 이어 최근 2년 만에 전면파업까지 벌어진 현대중공업 노사 갈등의 시작이었다.

사상 첫 3년치 임단협 타결 협상

핵심 크레인 불법점거 현대重 노조…회사 골병드는데 고용부는 뒷짐만
현대중공업은 8일 울산 본사의 크레인을 점거한 채 농성 중인 노조를 상대로 법원에 업무방해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크레인 점거 농성을 해제하고 주변 도로 300m에 설치한 천막과 현수막을 철거해 달라는 취지다. 이와 별도로 사측은 조경근 노조지부장 등 16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다. 크레인 점거와 물류 방해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할 예정이다.

앞서 노조는 2년치 임단협 교섭 부진을 이유로 지난 6일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노조는 2004년 이후 17년 만에 40m 높이의 크레인까지 점거하며 투쟁 강도를 높였다. 노사는 2019년 5월 임금협상 상견례를 했지만, 당시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한 법인분할을 놓고 마찰을 빚으면서 교섭이 틀어졌다.

이 과정에서 파업 징계자 처리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노조는 사측에 조합원 징계 및 해고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사측은 불법 행위를 용인할 수 없다며 맞섰다. 노사는 2019년 임단협, 2020년 임협을 함께 처리하기로 했지만 결국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올해 사상 처음으로 3년치 임단협 통합 교섭을 이끌어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1995년부터 2013년까지 19년 연속 무분규 타결을 이뤄냈지만 2014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강성 노조 집행부가 들어선 뒤 임단협이 해를 넘기거나 연말에야 겨우 절충점을 찾았다.

기본급·위로금 인상 요구한 노조

파업 징계자 처리 문제는 올 들어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노사는 두 차례 잠정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이견을 상당히 좁혔다. 지난 4월엔 2019년 기본급 4만6000원 인상과 성과급 218% 지급, 2020년엔 기본급 동결과 성과급 131%·격려금 430만원 지급 등에 잠정 합의했다. 하지만 이 합의안은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됐다.

조합원들은 사측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2020년 기본급 9만9000원 인상, 당기순이익의 30% 성과급 지급, 정년 연장(최장 만 64세) 등 3차 잠정합의안을 요구하고 있다. 사측은 여력이 없다며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전면파업을 철회하고, 대다수 조합원이 바라는 임단협을 위해 모두가 매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총 8000명인 현대중공업 노조원 중 이번 파업에 참가한 인력은 400명(사측 추산)으로, 5%가량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전면파업에 따른 생산 차질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대중공업에 따르면 2018년 노조의 전면파업 당시 하루 평균 매출 손실은 83억원에 달했다.

유명무실한 노조법 개정안

노조의 크레인 점거가 노조법 개정안을 위반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전면파업을 벌인 6일부터 시행된 노조법 개정안 제37조 3항은 사용자의 점유를 배제해 조업을 방해하는 형태의 쟁의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핵심 생산시설 보호를 위해서다.

이를 위반해 주요 업무시설을 점거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처벌조항도 있다. 행정관청도 이런 행위를 중지할 것을 통보해야 할 의무가 있다. 노조가 점거한 턴오버 크레인은 선박과 대규모 자재를 뒤집는 핵심 설비다. 순서대로 공정이 돌아가야 하는 조선업 특성상 크레인 공정이 막히면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개입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이번 노조법 개정안은 기존 원칙을 재확인한 것일 뿐”이라며 한발 물러선 채 관망하고 있다. 노조법 42조 1항엔 주요 업무시설은 점거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문제는 주요 업무시설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텔 로비는 주요 업무시설로 인정되지만 병원 로비는 수술 등 병원 고유 업무에 미치는 영향이 없어 인정받지 못한다. 업계 관계자는 “노조법 개정안 시행 첫날 현대중공업 노조가 전면파업을 벌인 배경엔 주요 업무시설 점거에 대한 정부의 개입 의지를 시험해 보려는 노림수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경민/정의진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