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시설이 좌초 자산일까..
SK이노베이션은 지난 1일 ‘스토리 데이’란 행사를 했다. 회사의 중장기 비전을 밝히는 자리였다. 배터리 설비 확장, 친환경 사업 강화 등 청사진이 줄줄이 나왔다. 하지만 정유사업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아 아쉬웠다.

SK이노베이션이 어떤 회사인가. 1962년 설립된 대한석유공사가 모태다. 미국에서 기름을 받아 쓰는 처지였던 당시 한국이 ‘기름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세운 것이 대한석유공사다.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1980년 SK에 넘어간 뒤 아시아 최고 수준의 정유사로 발돋움했다. 석유화학, 배터리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지만 여전히 정유업은 SK이노베이션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회사의 비전을 밝히는 자리에서 기대했던 정유사업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해법은 명확하지 않아 보였다.

이유가 있었다. ‘탄소 중립’이란 메가트렌드가 형성되자 SK이노베이션이 정유업을 줄이고, 배터리 등 다른 친환경 사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심각한 탄소문제에 봉착한 정유설비에 대해 자본시장 업계에선 ‘좌초자산’이란 말까지 한다. 생산 과정에서 탄소를 다량 배출하는 정유업에 대한 SK이노베이션의 우려는 크다. 이 회사 관계자는 “연 1200만t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데, 가만 놔두면 2030년 탄소배출 비용만 약 6조원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탄소절감을 위해 정유사 스스로 바뀔 때가 됐다는 의미다.

국내 정유업계는 SK이노베이션의 사업 전환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나타낸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내를 대표하는 정유사 조차 정유업 비중을 축소하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정부의 온갖 ‘탄소규제 폭탄’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도 깔려 있다. 구성원들의 사기 저하도 있다. 정유사는 ‘신의 직장’으로 불렸다. 그만큼 인재가 몰렸고 자부심도 컸다. 지금은 아니다. ‘탄소산업’이란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

한국 정유업은 세계 5위의 경쟁력을 갖췄다. 작년 한 해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215억달러(약 23조원)어치를 수출했다. 중국, 일본도 한국 기름을 사다 쓴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사업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상황에서 여전히 ‘에너지 주권’을 지키는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며 “정유산업이 ‘제2의 원전’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