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대만 TSMC에 이어 미국 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장 신축을 공식화하면서 두 회사가 미국에서 명운을 건 ‘수주 경쟁’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두 회사 모두 연간 파운드리 매출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만큼 고객사를 추가로 확보하지 못하면 대규모 손실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삼성전자-TSMC, 美서 파운드리 증설 전쟁
23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김기남 DS(반도체부품)부문 부회장(대표)은 지난 21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미국에 170억달러 규모 파운드리 투자를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삼성 최고 경영진이 미국 파운드리 투자를 공식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전자의 미국 파운드리 신공장 가동 시점은 이르면 2023년으로 예상된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활용해 선폭 5㎚(나노미터·1㎚=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를 생산하는 첨단 라인이 조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가 준비 중인 3㎚ 라인이 들어설 가능성도 있다.

투자 지역은 공개되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애리조나·뉴욕 주정부와 인센티브를 놓고 협상 중이다. 업계에선 텍사스 오스틴이 유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곳엔 1998년 양산을 시작한 파운드리 공장이 돌아가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초 오스틴시에 “공장을 지으면 세금 8억달러를 감면해 달라”고 요청했다. 회사 관계자는 “공장 후보지는 확정되지 않았고 발표 계획도 미정”이라며 말을 아꼈다.

애플, AMD, 퀄컴, 엔비디아 등 미국 고객사의 위탁 물량을 더 받으려는 파운드리업체 간 경쟁도 가열될 전망이다. 주요 업체의 미국 투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다. TSMC는 지난해 “120억달러를 투자해 2024년까지 미국 애리조나에 5㎚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근 로이터는 “TSMC가 최대 25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미국에 3㎚ 라인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인텔도 2023년 완공을 목표로 200억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파운드리 설비 투자가 ‘최소 3년, 최장 10년 이상’ 기간 동안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게 보통임에도 최근 업체들의 투자 규모는 ‘부담스러운 수준’이란 평가가 나온다. TSMC의 투자액(최대 370억달러)은 지난해 연 매출(454억달러)의 81% 수준이고, 삼성전자 투자액 170억달러는 15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연간 파운드리 매출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수주 산업이라는 파운드리 특성상 물량 확보에 차질이 생겨 가동률이 낮아지면 대규모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와 TSMC에 반도체 생산을 맡기고 있는 퀄컴의 스티브 몰렌코프 사장이 지난 21일 “삼성전자와 파운드리 분야에서 긴밀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으며 앞으로도 협력이 확대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장 없이 설계에 주력하는 퀄컴은 세계적인 ‘파운드리 큰손’으로 꼽힌다. 지난해 삼성전자에 주력 제품인 ‘스냅드래곤 888’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생산을 맡기기도 했다. 업계에선 “삼성전자의 숨통이 다소 트이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