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디폴트옵션 논란 <上>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도입 앞두고 보험업계 반발

여당안 "실적배당 상품만"
퇴직연금은 장기투자 상품
손실 가능성 낮고 고수익 가능

야당안 "원금보장형 포함을"
근로자 이직·중도인출 많아
위험회피형 투자자 보호해야
퇴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가 적극적인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특정 금융상품에 투자되는 ‘디폴트옵션 제도’가 조만간 도입될 전망이다. 한 퇴직연금 가입자가 삼성생명 홈페이지에서 구체적인 상품 내역을 살펴보고 있다.   /김범준 기자

퇴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가 적극적인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특정 금융상품에 투자되는 ‘디폴트옵션 제도’가 조만간 도입될 전망이다. 한 퇴직연금 가입자가 삼성생명 홈페이지에서 구체적인 상품 내역을 살펴보고 있다. /김범준 기자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 제도 도입을 앞두고 금융투자업계와 보험업계가 정면 충돌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포함하느냐 여부다. 증권·자산운용업계는 그동안 쥐꼬리만 했던 퇴직연금 수익률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기금을 ‘혁신 성장’의 마중물로 활용해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보험업계는 원리금이 보장되지 않는 상품으로만 구성될 경우 위험 회피형 근로자의 선택권과 수급권 보호에 미흡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여야 및 업계 간 대결 구도 형성
실적배당형 상품만 허용?…보험업계 "원리금보장형 선택권도 있어야"

현행 퇴직연금 제도는 2005년 12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제정, 시행되면서 도입됐다. 이에 따라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이란 개념이 처음 생겼다. DB형(전체 적립금 60.2%)에선 근로자의 퇴직급여가 ‘퇴직 당시 평균임금×근속연수’로 확정돼 있고 매년 적립금 운용 책임도 회사가 진다. DC형(26.3%)은 회사가 매년 내는 기여액이 ‘근로자 연봉의 12분의 1 이상’으로 결정돼 있으며 근로자가 책임지고 적립금을 운용한다. 임금상승률이 높고 장기근속이 가능한 근로자에겐 DB형이 유리하다. 급여 인상률이 낮거나 이직이 잦은 경우 DC형이 유리하다.

문제는 근로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퇴직연금이 어디에 투자되는지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DC형 가입자의 83%는 가입 후 단 한 차례도 포트폴리오 변경을 하지 않은 것으로 집계됐다. 고용노동부 표준규약에 따르면 가입자가 이처럼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을 경우 원리금보장 상품으로 운용하도록 돼 있다. 지난 수년간 저금리 기조 탓에 최근 5년간 국내 퇴직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연 1.77%에 그쳤다.

‘쥐꼬리 수익률’ 비판이 커지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당 간사를 맡고 있는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올해 초 DC형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에 실적배당형 금융상품만 포함하는 내용의 법안을 대표 발의했고 이어 정무위 여당 간사인 김병욱 의원도 사실상 동일한 취지의 법안을 냈다. 그러다 3월 정무위 소속인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형까지 추가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여야 간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동시에 금융투자업계와 보험업계 간 대리전 성격까지 띠게 됐다.
“근로자 선택권과 수급권 보호가 우선”
여당과 금투업계 측은 퇴직연금은 장기 투자자산이므로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하더라도 원금 손실 가능성이 매우 낮고 최종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반대로 야당과 보험업계는 한국 근로자의 평균 근속연수가 6.7년(2020년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 불과한 데다 임금피크제 등으로 DC형으로 전환된 50대 중반 이상 근로자는 정년퇴직까지 불과 3~5년밖에 남지 않아 장기투자가 구조적으로 어렵다고 맞서고 있다.

김대환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주식형펀드와 같은 실적배당형에 투자하면 (원리금보장형보다) 장기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도 “이직률이 높고 이런저런 사유로 중도에 적립금을 인출(중간정산)하는 사례가 많은 국내 현실에서 단기 변동성이 큰 실적배당형으로만 디폴트옵션을 구성할 경우 근로자의 수급권을 크게 저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입법 과정에서 업권 간 차별은 곤란”
회사가 운용 책임을 지는 DB형 퇴직연금 기금에 대해 증권사나 자산운용사와만 투자일임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한 여당안에도 보험업계는 “업권 간 차별”이라며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생명보험업계 관계자는 “이미 현행 제도하에서도 은행 보험 증권 등 퇴직연금 사업자가 운용 가능 상품을 제시하고 이 중에서 회사가 선택할 수 있도록 돼 있다”며 “증권사나 운용사 역량이 은행이나 보험사에 비해 더 낫다고 볼 근거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DB형 퇴직연금의 합리적인 운용을 위해 내년 4월 도입되는 ‘적립금운용위원회’의 운영을 내실화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적립금운용위는 DB형 퇴직연금을 도입한 상시근로자 300명 이상 기업이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위원회로, 매년 적립금운용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운용하도록 하고 있다.

■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퇴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가 따로 적립금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지정된 금융상품에 자동 투자하도록 하는 제도. 지금은 고용노동부 지침에 따라 은행 예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만 자동적으로 투자하게 돼 있다. 다만 가입자가 실적배당형으로 바꿀 수 있다. ‘쥐꼬리 수익률’ 지적에 펀드 등 실적배당형을 디폴트옵션으로 하자는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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