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정유사가 살아나고 있다. 정유사의 핵심 수익성 지표인 정제마진이 완연한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올 들어 기름값은 오르는데 마진이 개선되지 않아 애를 태웠던 정유사엔 긍정적인 신호다. 백신 접종으로 미국 유럽 등에서 이동량이 늘고 기름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당분간 정제마진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제마진, 3달러대 유지

정유사의 시간이 온다…기름 잘 팔리고 정제마진도 껑충
7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지난달 배럴당 평균 2.69달러까지 올랐다. 전달인 3월 1.9달러 대비 41.5% 뛰었다. 특히 4월 하순 정제마진은 3.38달러까지 치솟아 올 들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달 들어서도 3달러 선을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아시아 지역 정유사의 이익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통상 4달러는 넘어야 아시아 지역 상당수 정유사가 손해 보지 않고 영업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하반기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평균 1.8달러 선에 그쳤다. 코로나19로 기름 수요가 급감한 탓이었다. 팔수록 적자가 났다는 의미다. 국내 정유사의 지난해 적자 규모는 5조원대에 달했다.

올 들어서도 정제마진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1월 평균 1.4달러에서 2월 2.13달러로 다소 높아지는가 싶더니 3월 1.9달러로 내려앉았다.

유가가 오르면 마진이 개선되는 게 보통인데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 올 들어 3월까지 두바이유, 브렌트유 등 주요 유종이 평균 20% 안팎 상승한 것과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산유국이 기름 공급을 줄여 유가를 부양한 영향이었다. 정제마진이 오르려면 수요가 살아야 하는데, 공급만 줄었을 뿐 수요는 늘지 않았다. 그래도 정유사는 올 1분기 기름값 상승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싼값에 들여온 기름 덕분에 대규모 재고 평가이익이 발생했다. 이 덕에 에쓰오일(영업이익 6292억원), 현대오일뱅크(4128억원) 등은 지난 1분기 큰 이익을 냈다. 이런 재고 평가이익은 2분기엔 기대하기 어렵다. 기름값 상승세가 한풀 꺾인 탓이다. 향후 정유사의 실적 개선이 이어지려면 정제마진이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상승세 이어질 듯

글로벌 정제마진 상승은 지난달부터 시작됐다. 제품의 절반 이상을 수출하는 국내 정유사는 정제마진이 올라야 이익을 낼 수 있다.

정제마진 상승 기조는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우선 미국을 중심으로 기름 수요가 늘고 있다. 특히 항공유 수요 회복이 가파르다. 지난 3~4월 두 달간 미국 항공유 수요는 전년 동기 대비 약 20% 늘었다. 미국 최대 항공사 델타항공이 이달 초부터 가운데 좌석까지 판매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1년 이상 비워 놓은 좌석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사우스웨스트 등 저가 항공사는 지난 3월부터 이미 가운데 좌석에 탑승객을 앉히고 있다. 예약이 크게 늘면서 창가와 통로 좌석만으로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휘발유 판매도 늘고 있다. 미국은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6월부터 8월까지가 ‘드라이빙 시즌’이다. 올 드라이빙 시즌 이동량은 ‘역대급’이 될 전망이다. 미국 내 백신 접종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올여름 휴가철 이동 수요는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웃돌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휘발유 정제마진은 정상 궤도에 들어섰다. 최근 배럴당 10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과거 가장 좋았을 때도 10달러를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다.

반면 정유 공급량은 늘지 않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세계 정유설비가 하루 20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새 설비 가동보다 노후 설비 폐쇄가 더 많은 영향이다. 황규원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연내 세계 정유 노후 설비의 약 8%가 가동을 멈출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정유사는 ‘기초체력’이 좋아졌다. 지난해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4달러 아래의 정제마진으로도 이익이 가능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는 평가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정제마진이 3달러 선을 유지만 해도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안재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