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선 '온라인 보고' 실험…현대백화점 결재판 2만개 폐기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사진)이 이번엔 ‘일하는 방식’ 혁신에 나섰다. 주력 계열사인 현대백화점에서 실물 결재판 2만 개를 폐기하고 5~6줄의 온라인 보고만 올리는 파격 시스템을 도입한다. 유통업체들의 출혈 경쟁이 보편화된 상황에서도 ‘내실 다지기’에 주력해온 정 회장이 유연하고 민첩한 조직문화 만들기에 나섰다는 평가다.

19일 현대백화점은 “사내 보고 문화 개선을 위해 2만여 개의 실물 결재판을 폐기한다”며 “이를 대신해 사내 온라인 페이지와 모바일 그룹웨어에 ‘간편 보고 시스템’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현대백화점은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기존에 쓰던 문서양식을 대부분 없앴다. 틀에 박힌 양식 대신 직원들은 5~6줄의 간단한 문장에 핵심 내용만 담아 보고하면 된다. 간편 결재 버튼을 누르면 수신인·제목을 적는 창과 내용 입력 창만 뜨게 해 기존 양식이 쓰일 가능성을 원천봉쇄했다. 현대백화점은 보고 문화 개선뿐 아니라 MZ세대 중심의 유연하고 민첩한 조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번 조치에는 평소 정 회장의 경영철학이 반영됐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부터 전 직원을 대상으로 ‘일하는 방식의 변화’를 위한 설문조사와 투표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직원들이 회사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허례허식 타파’였다. ‘보고를 위한 보고자료를 만들지 말자’ ‘보고 형식에 구애받지 말자’ 같은 의견이 많았다. 이에 정 회장이 지난달 열린 경영전략회의에서 “최근 늘어난 MZ세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적극 적용할 수 있도록 사내 소통 방식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간편보고 시스템 도입이 결정됐다.

정 회장은 평소에도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로열티’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백화점의 연봉은 유통업계 최고 수준이다. 정 회장은 “매출 1위 회사가 아니라 직원들이 동종업계 최고 대우를 받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자주 언급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MZ세대를 챙기면서도 다른 세대 직원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정 회장은 최근 다른 기업에서 거세지고 있는 MZ세대 직원들의 연봉 인상 요구와 관련한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젊은 직원뿐 아니라 중간에 낀 관리자분들도 고생이 많을 테니 잘 챙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