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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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분쟁에 극적으로 합의한 것은 소송 장기화에 따른 사업 불확실성을 없애고, 급성장 중인 미국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한 목적이 크다. SK는 미국에서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을 온전히 가동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고객사 확보도 가능해졌다. LG는 거액의 합의금을 챙기고 대외적으로는 배터리 기술력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양사 모두 ‘명분’과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예상 뛰어넘은 합의금

합의금 2조원(현금 1조원, 로열티 1조원)은 당초 업계에서 예상한 수준을 웃도는 것이다. 현금 1조원은 올해와 내년 두 차례에 걸쳐 5000억원씩 나눠 낸다. 로열티 1조원은 2023년부터 2030년까지 8년간 지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금 1兆 + 로열티 1兆…LG - SK, K배터리 위기감에 '윈윈' 택했다
LG가 2019년 4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했을 때만 해도 ‘조(兆) 단위’ 합의금은 불가능한 금액으로 여겨졌다. 그해 9월 양사 최고경영자(CEO) 간 회동과 작년 2월 SK가 ITC로부터 ‘조기패소’ 결정을 받은 뒤에도 양측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LG는 조기패소를 근거로 최대 7조~8조원을 요구했고, SK 측은 1000억원 이상으로 대응했다. 올 2월 ITC가 최종적으로 SK에 10년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타협의 여지는 열렸다. SK가 “1조원 이상은 안 된다”며 액수를 천억 단위에서 1조원 수준으로 올렸고, LG도 ‘3조원+α(알파)’로 요구액을 낮췄다.

결국 양측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한을 앞두고 2조원으로 절충점을 찾았다. 업계에서는 “SK로선 미국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을 덜었고, LG로서도 영업비밀 침해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은 셈”이라며 “양측 모두 대승적 차원의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본다”고 했다.

미국시장 주도권 확보 ‘청신호’

이번 합의로 양사의 미국 시장 입지가 급격히 커질 전망이다. SK로선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의 ‘정상 가동’이 가능해졌다. SK는 공장 부지 무상 제공, 세제 혜택 등의 조건으로 조지아주에 총 3조원을 투자, 두 곳의 공장을 짓기로 2018년 계획을 세웠다. 두 공장이 돌아가면 생산능력이 총 21.5GWh에 달한다. 테슬라의 기가 팩토리(35GWh)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SK는 조지아공장에서 기존에 수주를 받아놓은 포드와 폭스바겐 물량을 우선 공급할 예정이다. 미국 내 전기차 공장을 보유한 완성차 업체들을 고객사로 추가 확보하려는 노력도 병행한다. SK 관계자는 “미국은 물론 글로벌 전기차산업 발전과 생태계 조성을 위한 국내외 추가 투자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LG 또한 미국 내 투자를 가속화한다. LG는 지난달 총 5조원을 투자해 연 70GWh의 배터리 생산능력을 2025년까지 추가로 확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GM과 합작한 얼티엄셀즈를 통해 올해 말 연 35GWh의 배터리 공장을 가동하고, 비슷한 규모의 2공장을 짓는 데 합의했다. 이들 공장이 모두 돌아가면 연 145GWh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단숨에 미국 내 최대 배터리 사업자로 올라선다는 로드맵을 세웠다.

미국은 지난 2월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 강력한 전기차 보급 정책을 펴고 있어 조만간 중국, 유럽을 뛰어넘는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이 될 것으로 업계에선 보고 있다. LG와 SK가 이번 합의로 미국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의 핵심 사업자가 될 전망이다.

‘K배터리’ 글로벌 도약 계기 되나

한국 배터리 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K배터리 3인방’의 작년 세계 시장점유율은 34.7%에 달했다. 2019년의 16%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아졌다. 하지만 올 들어선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 기업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올 1~2월 CATL 점유율은 31.7%까지 상승, LG(19.2%)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SK 점유율도 5% 수준까지 떨어져 중국 BYD(7%)에도 미치지 못했다. 업계에선 치열하게 전개된 배터리 기술 분쟁 탓에 양사가 영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일부 완성차 업체도 한국 배터리 채택을 꺼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극한 대치를 이어가던 LG와 SK가 모든 분쟁을 마무리지으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확산하는 ‘K배터리 위기론’도 잠재울 수 있게 됐다”며 “LG와 SK가 선의의 경쟁자이자 동반자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한국 배터리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