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신' 신춘호 회장 타계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
새우깡·쌀면·건면·짜장라면 등
세상에 없던 식품 만들고 작명도

실패에 너그러운 은둔의 경영자
"농부의 마음이면 못 이룰 게 없다"
< 최고의 라면 향한 56년의 여정 > 신춘호 농심 회장이 1982년 사발면 출시를 앞두고 시식을 기다리고 있다.

< 최고의 라면 향한 56년의 여정 > 신춘호 농심 회장이 1982년 사발면 출시를 앞두고 시식을 기다리고 있다.

“거짓없는 최고의 품질로 세계 속의 농심을 키워라.”

지난 27일 별세한 농심 창업주 신춘호 회장이 임직원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1965년 농심(옛 롯데공업)을 세운 이후 품질 경영을 고집해 온 그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품질을 강조했다. 신 회장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만들어 우리 국민에게 사랑받은 뒤 세계인에게 우리의 맛을 그대로 알려야 한다”는 철학을 지켜왔다. 그는 ‘은둔형 경영자’이기도 했다. “식품업계 경영자는 맛과 제품으로 이야기한다”는 생각으로 언론 인터뷰는 물론 공식석상에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세계에 매운맛 보여준 'K푸드 개척자'…눈감는 날까지 품질 챙겼다

농부의 땀에서 배운 ‘농심’
1980년 스프 설비 조사를 위해 유럽을 방문한 신 회장.  농심 제공

1980년 스프 설비 조사를 위해 유럽을 방문한 신 회장. 농심 제공

신 회장은 ‘이농심행 무불성사’를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일하면 못 이룰 게 없다는 뜻이다. 우직하고 성실하게 땀을 흘리는 농부의 마음을 믿었다. 사명을 ‘농심(農心)’으로 정한 이유다.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동생인 신 회장은 일본롯데 이사로 재직하다 형의 만류를 무릅쓰고 롯데공업을 차려 독립했다.

농심을 1등 기업으로 키운 건 투자와 기술 개발이다. 1965년 첫 라면을 생산한 해에 라면연구소를 세웠다. 서울 대방공장을 모태로 안양공장, 부산 사상공장, 구미공장 등을 첨단 식품 생산기지로 만들었고 해외 중점 국가인 미국, 중국에도 대규모 공장을 지으며 진출했다. 기술이 곧 품질이고 혁신이라고 믿어온 신 회장은 2010년부터 직원들에게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라면업계 지난 50년이 스프 경쟁이었다면 앞으로 50년은 제면 기술이 좌우할 것”이라며 “다른 것은 몰라도 경쟁사와의 연구개발(R&D)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라”고 독려했다.

굵은 면발 열풍을 일으킨 짜왕과 맛짬뽕(2015), 신라면의 제2전성기를 이끈 신라면건면(2019) 등 혁신 제품들은 이 같은 전략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연구원들이 원가를 낮추기 위해 굵은 면에 일부 들어가는 쌀가루로 5년 묵은 통일미를 사용하다가 신 회장으로부터 “품질은 좋은 원재료에서 나온다. 프로젝트를 전면 재검토하라”는 불호령을 듣기도 했다.
“100년 기업은 실패가 만든다”
농심의 제품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로 수천 번 실패하다 제조해 낸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 국내 최초의 쌀면과 건면 특허 기술, 국내 최초의 짜장라면 등이 수많은 도전 끝에 나왔다.

신 회장은 실패에 너그러운 경영자였다. “실패는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지혜와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50년 넘는 장수 기업에 30년 넘는 메가히트 상품들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비결이다. 1971년 새우깡 개발 당시에도 “맨땅에서 시작하자니 우리 기술진이 힘들겠지만, 우리 손으로 개발한 기술은 고스란히 우리의 지식재산으로 남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신 회장은 농심의 ‘작명왕’이었다.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고 임원들을 설득했다. 신라면, 짜파게티, 새우깡, 너구리 등 히트 상품의 이름은 신 회장이 직접 지었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이 그렇다. 신 회장은 2010년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참 어렵게 꾸려왔다.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고 한여름 가마솥 옆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내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 같다.”
뚝심이 이룬 라면왕국…세계 울린 신라면
신 회장의 눈은 늘 글로벌을 향해 있었다. 농심은 눈앞의 변화만 좇기보다 미래를 위한 기술과 인프라를 준비하는 기업문화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산시설도 미래 수요까지 감안해 미리 준비했다. 해외 진출도 마찬가지다.

신 회장은 1980년대부터 “세계 어디를 가도 신라면을 보이게 하라”는 ‘지상과제’를 앞세워 수출드라이브를 걸었다. 국내 식품회사 중 가장 먼저 해외에 진출했다. 라면을 처음 수출한 것은 1971년. 창업 6년 만이었다. 지금은 남극의 길목부터 알프스 최고봉에서까지 ‘신라면’이 팔리고 있다. 농심은 1981년 일본 도쿄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했고, 1996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공장을 세웠다. 중국 공장을 3개까지 늘린 뒤 2005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공장을 지었다. 하늘 위와 땅끝까지 농심은 ‘실핏줄 전략’으로 신라면을 팔았다. 스위스 최고봉 몽블랑의 등산로와 융프라우 정상 전망대, 칠레 최남단 마젤란해협 근처의 푼타아레나스까지 진출했다.

해외에서의 성과는 느리지만 견고하게 ‘초격차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농심의 라면 수출액은 2004년 1억달러에서 지난해에는 9억9000만달러로 급증했다. 미국시장에서 일본 라면보다 3~4배 비싸지만 더 잘 팔린다. 지난해 전체 매출의 약 40%를 해외에서 달성했다. 신 회장은 별세하기 전 서울대병원에 10억원을 기부했다. 오랫동안 치료해온 의료진과 병원 측에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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