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 떠난 박용만 "기업 성장 고민할 때, 최선은 덜 건드리는 것"
"정치하시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 자신을 지지하는 집단이 아닌, 미래를 위한 일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박용만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아직 할 말이 많았다. 대한상의 회장을 지난 7년 8개월간 수 많은 '쓴소리'를 쏟아냈던 그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많은 걸 바꾸고 싶어했고, 좀처럼 바뀌지 않는 현실에 답답해했다. 박 전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직을 후임(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넘겨준 지난 24일, 서울 두산타워에 있는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하는 마지막 인터뷰였다.

박 전 회장이 퇴임 이후 하고 싶은 일, 지난달 출간한 책, 평범한 일상에 대한 기대 등 가벼운 주제에 대해 대화를 주고 받을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시간 30분 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는 규제와 기득권의 문제를 지적했고, 정치권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했다.

▶최근 청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젊은 창업자들, 무력감을 많이 느낍니다. 자신들이 무언가를 해보려는데, 규제라는 법제도 때문에 시작조차 못하는 상황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이들은 내가 하겠다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닌데, 왜 기존 법과 제도에 막혀 포기해야하는 지 납득을 못합니다. 과거의 기준이나 오래된 시각 때문에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을 가로막고 있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규제를 풀기위해 스타트업 대표들과 함께 국회를 찾아간 적도 있으시죠.
"그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하다보니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신산업을 위한 법도 온갖 이유 때문에 통과가 안되고, 심지어 여야 이견이 없다는 법인데도 2년 넘게 묵혀있습니다. 새로운 기업이 한국 10대그룹에 들어가고, 글로벌 기업이 되는 모습을 너무 보고싶은데 신산업을 시작할 수도 없게 만드는 규제에 막혀 있는 게 현실이죠. 7년 8개월동안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도 안 바뀌네요."
상의 떠난 박용만 "기업 성장 고민할 때, 최선은 덜 건드리는 것"
박 전 회장은 빅데이터를 다양한 산업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가장 열심히 뛰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데이터 3법 처리가 지연되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국회에 막혀 있는 것을 보면 울분에 벽에다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는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를 만나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을 비롯한 규제혁신 법안 32개를 처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젊은 창업자들이 규제에 가로막히는 현실이 왜 자꾸 반복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가 바뀌지 않았으니깐요. 규제의 근거가 되는 건 법인데, 그 법은 정치가 만듭니다. 정치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나를 지지하는 집단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국가적 관점에서 미래를 위한 노력도 함께 해달라고 말입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어떤 상황이라고 보십니까.
"현재 경제의 화두는 살아남기입니다. 코로나19 충격을 어떻게 버틸 것이냐는 대처를 잘했다고 봅니다. 문제는 앞으로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죠."

▶무엇을 해야 합니까.
"미래 경제에 대해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너무 걱정입니다. 인공지능(AI)이니 빅데이터니 미래에 대한 전망은 쏟아지는데, 그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지 정책적 준비에 너무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과거처럼 정부가 산업정책을 만들고 이끌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느 산업이 클 지는 정부가 아닌 시장이 정하니깐요."

▶그렇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합니까.
"어떻게 하면 기업들이 새로운 변화에 대응할 수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서 지원할 때라고 봅니다. 이와 별개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급적 덜 건드리는 것입니다. 시장에 맡기고,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자는 것입니다. 자꾸 손발을 묶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변화를 따라갈 수 없죠. 포지티브규제(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일부만 허용)에서 네거티브규제(원칙적으로 풀고 일부만 금지) 방식으로 바꾸는 게 최우선입니다."

▶상법,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 기업을 묶는 정책이 더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가 못했던 숙제를 하려다보니 기업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공정한 거래질서를 세우겠다는 목표에는 누가 반대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라는 게 시점이나 시각을 달리 하면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조금 감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치권이나 관료사회는 자꾸 규제를 만들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뀌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기업들이 허덕이고, 산업은 아예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행정이 늘어나는 규제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회는 급격하게 바뀌고, 들여다 봐야 할 분야는 갈수록 늘어갑니다. 행정이 비대해지고 비효율적으로 바뀌다가, 결국 감당을 못하는 상황이 오겠죠."

박 전 회장의 목소리는 규제에 대한 대화가 이어질수록 커졌다. 그는 한국의 기업 환경을 안 좋게 만들어놓고 자꾸 유턴하자고 제안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상의 떠난 박용만 "기업 성장 고민할 때, 최선은 덜 건드리는 것"
▶최근 상속세에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
"자식에게 부를 물려주고 싶은 욕구를 인정해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식에게 무언가를 물려주고 싶을 겁니다. 이걸 무조건 막는 게 과연 맞을까요. 무조건 막으니깐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분들까지 편법을 쓰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들이 다 나빠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죠."

▶어떻게 바꿀수 있을까요.
"부를 자식에게 넘겨주는 길을 열어주되,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국가와 사회에 공헌을 하도록 해야죠. 공헌할 기회를 주고, 공헌을 하면 부를 넘겨주는 걸 인정하자는 뜻입니다. 소득세율을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구요. 물론 상속을 받지 못하는 이들과 무언가를 물려받은 이들의 격차가 절대 좁혀지지 않으면 문제겠죠. 이건 사회안전망이나 교육 등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왜 상속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지우나요. 그들을 처벌하고 부담을 떠안기는 게 해결책은 아닙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선처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기업인에 대한 선처를 호소한 건 처음입니다. 이 부회장이 재판정에 서고,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은 삼성이라는 기업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한국 기업인을 대표해서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업인들이 함께 져야 할 책임이죠. 그리고 삼성이 잘못한 게 있다면 그 잘못을 가장 잘 바꿀수 있는 사람도 이 부회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부회장이 삼성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환골탈태시킨다면 국가 전체를 봤을 때 이익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최태원 회장이 처음에는 대한상의 회장직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서울상의 회장단이 같이 추대한 것이죠. 다만 그 전에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유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강하게 얘기할 수는 없었어요. 내가 SK그룹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또 국내 5대그룹을 경영한 경험이 없어서 그만큼 큰 기업을 이끌면서 대한상의 회장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최 회장이 국가 경제를 위해 봉사해보겠다는 생각을 해줘서 너무 감사하죠. 대한상의 회장이 되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합니다. 공적인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런 자리를 맡아준 최 회장에게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책(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은 잘 팔립니까.
"한 달만에 3쇄까지 갔으니 괜찮은 편이죠. 베스트셀러보다 스테디셀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공감한다는 분들이 많으니 감사합니다. 다만 대기업 회장이 썼으니 당연히 대필일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 속상합니다. 난 대기업 회장으로 이 책을 쓴 게 아니라, 저자로 데뷔를 한 것인데 말입니다."

▶책 제목에 있는 그늘이라는 단어를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듯 합니다.
"젊은이들은 그늘이 다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요.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언을 해 그늘을 걷어주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럴수가 없어요.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대신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어른이 되자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쓴 내용들을 젊은 독자들이 좋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앞으로 행보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아직 결정을 안했으니깐. 지금까지는 박용만 뒤에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같은 수식어가 항상 따라왔는데 이제 그런건 그만하고 싶어요. 그냥 박용만으로 살고 싶어요. 경영도 충분히 했고, 공적인 일도 할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쓰여있는 백지명함을 만들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늘(지난 24일)이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마지막 날입니다.
"시원하지도 섭섭하지도 않다고 이미 말했는데, 오늘 감정을 얘기하자면 사람에 대한 아쉬움이 남네요. 매일 같이 보던 상의 식구들을 못 볼거라고 생각하니 허전합니다. 7년 넘게 만난데다, 처음으로 하는 공적 업무를 도와준 동료였으니 더 마음에 남네요."

도병욱/이수빈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