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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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품 하나 가입하는건데, 아직도 뭐가 더 남았나요? 설명은 이제 들은 걸로 해주면 안되나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의 한 은행 영업점, 40대 남성 A씨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펀드를 가입하는 과정에서 직원 설명이 40분 가까이 이어지면서다. 그는 상담 내내 “시간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죄송하다. 법이 바뀌어 어쩔 수 없다”는 직원의 답만 돌아왔다.

#2. 이날 서울 명동 은행의 스마트 키오스크에는 상품 가입 중단을 알리는 공지가 붙었다. 가입 버튼을 누르자 ‘금소법 시행에 따른 업무 처리 프로세스 개선을 위해 한시적으로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메시지가 떴다. 일부 고객은 두리번 거리다가 창구를 향했다.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시행 첫날부터 일선 은행 창구에서는 극심한 혼선이 빚어졌다. 상품 가입에 걸리는 시간이 대폭 늘어나면서 곳곳에서 직원과 고객간 갈등이 벌어졌다. 소비자가 가입한 금융 상품을 원하면 손쉽게 철회(계약취소)할 수 있게 되면서 당분간 창구의 혼란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예적금 드는데 10분→30분

이날 시행된 금소법은 일부 금융상품에만 적용하던 ‘6대 판매규제’(적합성 원칙·적정성 원칙·설명의무·불공정영업행위 금지·부당권유행위 금지·허위 과장광고 금지)를 전 금융 상품으로 확대한 게 골자다. 투자 상품 가입시 투자 성향 분석 문항수는 7개에서 15개로 두배 이상 늘었고, 판매자는 판매 전 과정을 녹취하는 게 의무다. 예·적금만 가입하더라도 상품 설명서와 약관을 모두 출력해 전달해야 한다다. 소비자는 상품 가입 7~15일 안에는 단순 변심으로도 계약을 철회할 수 있게 됐다.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취지이지만, 현장에서는 불편을 겪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 우선 모든 금융 상품의 가입 소요 시간이 대폭 늘었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예적금을 가입할 때 예금거래신청서 한장만 작성하면 가입이 끝났다. 이날부터는 적금 하나를 들더라도 3단계(가입 권유 확인서, 예금 거래 신청서, 예금성 상품 계약서)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은행원은 이후 민원처리 절차, 예금자보호 여부, 이자율, 이용 제한사항 등의 정보를 하나 하나 읽어주며 이해했는지 확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한 은행 창구 직원은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계약 해지 관련 내용과 민원처리 등의 절차를 다시 한 번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며 “5분이면 끝나던 예적금 상품 가입 소요 시간이 30분 이상으로 늘었다”고 토로했다. 서울 구로구의 한 은행 영업점 관계자도 “정기예금을 가입할 때 뿐 아니라 단순히 재예치하는데도 상품 설명서, 약관 등 출력물을 제공해야 하는 것에 놀랐다”며 “서류뭉치를 건네자 ‘읽어보지도 않을 종이를 뭐 이렇게 많이 주느냐’고 불만을 제기한 고객도 있었다”고 말했다.

◆펀드 가입하면 대기 줄 더 늘어

펀드 등 손실 가능성이 있는 투자 상품은 가입 과정이 더 복잡해졌다. 투자 성향 분석 문항의 수가 크게 늘어난데다, 각 문항별 설명 시간도 길어졌다. 서울 송파 소재의 한 시중은행 영업점 관계자는 “적립식 펀드 가입시에도 투자 성향 분석 시간이 길어지면서 고객당 상담 시간이 기존 대비 20분 이상 늘었다”며 “개별 고객 응대 시간이 늘다 보니 일부 고객은 업무를 보지 못하고 나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날 상당수 회사의 월급 지급일이 겹치면서 일부 오피스 지구의 영업점에는 이례적으로 긴 줄이 늘어서기도 했다.

은행 창구의 혼란은 당분간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은행들의 얘기다. 새 법에 따르면 고객은 대출 실행일로부터 14일 이내 마음이 바뀌면 대출을 철회할 수 있다. 단 철회의사를 표시하고, 원리금과 비용(서류발급비 등)을 상환해야 한다. 오는 5월 10일부터는 펀드도 단순 변심에 의해서도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다만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으로 분류되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고난도 상품’에 대한 정의는 5월 께 나올 전망이다. 주가연계증권(ELS)이나 주가연계펀드(ELF) 등이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게 업계 전망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단순 변심으로도 대출이나 펀드 청약을 철회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상품에 가입한 뒤 다른 은행의 금리가 더 좋거나, 증시 등 외부 경제 여건이 나빠졌다며 철회를 해도 은행이 막을 수 없게 됐다”며 “이를 악용하는 고객이 늘면 은행 현장은 더욱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금융권의 준비 부족과 적응 기간 등을 고려해 과징금 부과 등 제제 조치에 대해서는 6개월간 유예기간을 두겠다는 입장이다.

정소람/오현아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