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파운드리 전격 진출

인텔, 200억弗 투자해 공장 2곳 건설…2024년께 가동
美정부 '반도체 육성' 선봉에 선 겔싱어 "亞 의존 낮추겠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오른쪽 사진)가 24일 열린 온라인 브리핑에서 “20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에 팹(공장) 두 곳을 짓고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왼쪽 사진은 인텔의 파운드리 팹이 들어설 예정인 미국 애리조나주 오코틸로 캠퍼스 전경.      /인텔  제공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오른쪽 사진)가 24일 열린 온라인 브리핑에서 “20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에 팹(공장) 두 곳을 짓고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왼쪽 사진은 인텔의 파운드리 팹이 들어설 예정인 미국 애리조나주 오코틸로 캠퍼스 전경. /인텔 제공

‘80%, 15%, 5%.’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24일 온라인으로 진행한 사업전략 발표회에서 강조한 숫자들이다. 글로벌 반도체 생산에서 각각 아시아, 미국,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낸 수치다. 겔싱어 CEO는 배경 화면에 세계지도와 숫자를 띄워놓고 “대부분 반도체 제조시설이 아시아에 집중돼 있다”며 “인텔의 미국과 유럽 공장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게 고객사의 이익과 각국 안보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 반도체 패권의 선봉에 선 인텔
민간기업인 인텔의 CEO가 국가 안보와 반도체 생산의 지정학적인 균형을 언급한 건 이례적이다. 겔싱어 CEO의 발표 뒤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유세 기간 반도체 등 핵심산업의 ‘메이드 인 USA’를 강조했고, 취임 후 자국 반도체산업 육성을 ‘1순위’로 앞세우고 있다.

겔싱어 CEO는 이날 프레젠테이션의 상당 부분을 미국 애리조나 팹(공장) 건설에 할애했다. 그는 200억달러(약 22조5000억원) 규모 투자금과 3000개 이상의 고임금 일자리 창출, 1만5000명 수준의 장기 고용 인원을 내세우며 “미국에서 제조 역량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며 “인텔이 미국 정부와 애리조나 주 정부와 함께 협력할 수 있어 기쁘다”고 강조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인텔이 미국 반도체 패권 전략의 선봉에 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인텔 앞세워 '반도체 패권' 장악 나선 美…'총수 부재' 삼성 초긴장

인텔이 이날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진출을 선언하며 내세운 명분도 ‘미국 반도체산업의 발전’이다. 파운드리는 생산시설이 없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의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제작하는 사업이다. 대만 TSMC와 삼성전자가 양분하고 있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주요 고객은 미국 업체들이다. 엔비디아, 퀄컴 같은 미국 팹리스와 구글, 아마존 등 ‘반도체 자체생산’을 추진 중인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대표적이다.

겔싱어는 미국 고객사들의 지지를 받아 파운드리 사업에 안착할 것이란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아마존과 시스코, 에릭슨,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 잠재적 (미국) 고객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에 특히 위협
삼성전자는 인텔의 발표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인텔이 중앙처리장치(CPU) 설계 및 생산을 통해 쌓아온 노하우 등을 감안할 때 ‘무서운 경쟁자’가 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반도체 매출 세계 1위 업체의 자금력과 인재풀 등을 활용해 파운드리 사업에서도 무섭게 치고 올라올 것이란 얘기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인텔이 보유한 설계자산과 ‘미국 기업’이란 장점을 감안할 때 삼성전자 등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텔보단 막후에서 조종하는 미 정부의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본격적으로 자국 기업 육성에 나섰기 때문에 삼성전자 같은 한국 기업은 상대적인 피해를 감안해야 한다는 얘기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의 방향을 결정할 총수가 부재한 상황도 변수로 꼽힌다. 삼성전자가 ‘속도전’에 밀리지 않기 위해선 추가 투자를 통해 ‘초격차’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으로 의사 결정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다.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한국과 대만이 세계 반도체 제조 기술의 패권을 가져올 수 있었던 건 미국 정부의 무관심이 크게 작용했다”며 “미국이 자국 반도체 육성에 나서고 있어 한국 기업엔 매우 큰 도전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행인 것은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기술 측면에선 5㎚(1㎚=10억분의 1m) 공정에서 제품을 생산 중인 삼성전자, TSMC에 비해 인텔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인텔은 기술 격차가 2년 정도로 평가되는 10㎚ 공정에 머물러 있다. 인텔이 200억달러를 들여 건설할 애리조나 팹이 2024년부터 가동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5㎚ 이하 초미세공정 경쟁에선 삼성과 TSMC가 앞서 있는 상황”이라며 “인텔은 초미세공정이 필요하지 않은 미국 팹리스들을 공략하며 사업 영역을 넓히는 전략을 활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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