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자에 사업장 출입 빗장 풀어주면서…뒷감당은 누가 하라고?"

사업장 시설 재산권으로 인식
선진국에선 출입 규제하는데…

정부 "노사가 알아서 규칙 만들라"며
모호한 노조법 규정 방치
“기울어진 운동장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정부가 모호한 규정을 방치하면서 노사 갈등을 키우고 있다.”

17일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노조법 시행령 개정안을 놓고 한 경제단체 관계자가 한 말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영계는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를 앞두고 개정 노조법의 모호한 규정이 현장 혼란을 부를 수 있다며 시행령으로라도 보완 장치를 마련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시행령 개정안에는 이 같은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경영계 보완요구 묵살한 정부, 갈등 부추기나

경영계 호소에 귀 닫은 정부
경총은 지난 9일 해고자 등 사업장에 종사하지 않는 노조원이 사업장에 출입할 때에는 관련 규칙을 준수할 의무를 부과하고, 사용자가 승인한 경우에만 출입을 허용하는 내용을 시행령에 담아달라고 요청했다. 또 개정 노조법에 따라 단체협약 유효 기간이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어나는 만큼 협약 상대방인 교섭대표노조의 대표 지위 유지 기간도 3년으로 맞춰달라고 했다.

경영계의 이 같은 요구는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한 노조법이 지나치게 모호해 불필요한 노사 갈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정 노조법에는 비종사 조합원의 사업장 출입 및 활동과 관련해 ‘사용자의 효율적 사업 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만 명시했다. 또 사업장을 점거하는 형태의 쟁의행위와 관련해선 ‘사용자의 점유를 배제하여 조업을 방해하는 행위는 금지한다’고 돼 있다. 법 개정 당시에도 ‘효율적 사업운영 범위’ ‘사용자의 점유를 배제하는 정도’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는 해고 노조원 등의 사업장 출입 문제는 노사 자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고용부는 이날 배포한 ‘개정 노조법 설명자료’에서 ‘효율적 사업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와 관련해 “기업별 특성에 따라 달리 적용해야 할 문제로 일률적으로 정하기 어렵다”며 “노사가 규칙 또는 절차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당장 경영계에서는 “노조법 개정으로 해고자들이 사업장을 드나들도록 빗장을 풀어주고 뒷감당은 노사가 알아서 하라는 얘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사용자의 점유를 배제한 점거 금지’에 대해 정부는 핵심 시설이 아닌 경우에는 사실상 대부분의 점거를 허용한다는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고용부는 관련 예시로 ‘수술·입원실이 아닌 병원 로비 점거는 가능하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례를 제시했다.
선진국은 사용자에 출입 통제권
정부는 해고자 등의 사업장 출입을 노사 자율로 해결하라고 권고했지만 미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사업장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사업장 시설을 사용자의 재산권으로 인식해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사업장에 소속되지 않은 조합원이 회사에 들어가려면 사용자에게 어떤 종류의 활동을 할 것인지 사전에 명확히 통보해야 한다. 어떤 용무로 회사에 들어오는지 사전에 허락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판례와 다수설 역시 사용자의 의사에 반해 사업장에 들어오는 행위는 주거 침입 등으로 판단한다.

호주의 경우 공정근로법에 사내 출입권과 관련한 절차와 권리 등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업주가 노조를 포함한 이해관계자의 사업장 출입에 대해 통제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뉴질랜드도 고용관계법에서 노조 대표자의 사업장 출입을 허용하면서도 노조 대표가 사업장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사용자가 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다음날까지 그 사유를 노조에 통지하면 된다.

미국은 사용자의 출입 거부권을 아예 재산권의 일종으로 인정한다.

국내법도 해외 선진국과 같이 규정을 명확히 해야 불필요한 노사 갈등을 막을 수 있다는 게 경영계의 지적이다. 경총 관계자는 “지금도 현장에서는 노조 간부와 동행하면 누구라도 무사통과되는 게 현실”이라며 “노사 자율로 해결하라는 것은 현장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