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간 벌어진 ‘배터리 기술 분쟁’과 관련, “SK가 LG의 영업비밀 침해 없이 독자적으로 제품을 개발했다면 10년은 더 걸렸을 것”이란 의견을 5일 밝혔다.

"SK이노베이션, LG 기술 없었다면…배터리 독자개발 10년은 걸렸을 것"
ITC는 이날 공개한 최종 의견서에서 SK이노베이션에 대해 지난달 내린 ‘미국 내 10년 수입금지’ 조치의 근거를 제시했다. ITC가 가장 문제 삼은 부분은 SK 측의 증거인멸 행위였다. “고위층이 지시해 조직장들에 의해 전사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ITC는 작년 2월 SK 측에 조기패소 판정을 내렸을 때도 “자료를 파괴한 행위가 만연했고 조직 차원에서 묵인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ITC는 “SK이노베이션이 정기적 관행이라는 변명으로 노골적으로 악의를 갖고 문서를 삭제하고, 은폐를 시도했다”고 강조했다.

이를 근거로 ITC는 LG에너지솔루션이 주장한 11개 항목의 22개 영업비밀을 법적 구제 명령 대상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수입 금지 기간 또한 LG 측의 주장에 동의, 10년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ITC는 “침해한 영업비밀이 없었다면 SK가 해당 정보를 10년 안에 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10년 기간이 과도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또 SK이노베이션이 2018년 폭스바겐이 발주한 물량의 입찰 과정에서 LG 측의 영업비밀을 활용해 최저가 입찰을 했고, 실제 수주로 이어졌다는 점도 지적했다.

LG 측은 이와 관련, “지난 10년 동안 배터리 연구개발(R&D)에 5조3000억원, 시설투자에 약 15조원을 사용했다”며 “SK가 영업비밀 침해로 R&D 분야에서만 5조3000억원의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SK 측은 영업비밀 침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입장문을 내고 정면 반박에 나섰다. “ITC가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실체적 검증 없이 문서 삭제 등 절차만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SK 관계자는 “ITC가 영업비밀을 침해했다고 결정하면서도 침해했다는 영업비밀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떻게 침해됐다는 것인지는 판단하지 못했다”며 “ITC 의견서 어디에도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영업비밀 침해가 인정된 22개 항목에 대해서도 “개별 수입 물품이 실제 수입금지 대상에 해당하는지는 별도 승인을 받도록 해 범위가 모호하다고 ITC 스스로 인정했다”고 덧붙였다.

SK이노베이션은 증거인멸에 대해선 “일부 팀에서만 판단 착오로 벌어진 문서 삭제를 LG에너지솔루션이 전사적이고 악의적인 증거 인멸이 있는 것처럼 주장한 것을 ITC가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SK이노베이션은 “ITC의 모호한 결정이 미국 전기차 배터리산업에 심각한 경제적·환경적 해악을 불러올 것”이라며 ITC 최종 결정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강력히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다음달 11일 이전까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