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회사채 금리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서 대기업 CFO들이 새로운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 공포가 극심했던 작년만 해도 최대한 많은 자금을 끌어모으는 게 최우선이었지만, 이제는 최대한 저렴한 비용으로 돈을 빌리는 것도 중요해져서다. 투자자들이 원하는 금리 하한선이 뚜렷해지면서 조달금액을 늘리면 채권 발행금리가 올라가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대규모 투자수요를 모았음에도 채권 발행금액을 늘리지 않는 기업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

기아는 지난 3일 3000억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했다. 지난달 말 수요예측에서 2조200억원의 매수주문이 쏟아졌지만 증권신고서에 적은 모집금액만큼만 발행하기로 확정했다. 발행한도를 6000억원까지 잡아놓은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다. 이 회사가 수요예측을 마친 뒤 채권 발행규모를 늘리지 않은 것은 2012년 수요예측 제도 도입 이후 처음이다.

기아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조금이라도 낮은 금리로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는 이번 채권을 모든 만기 구간에서 연 1%대로 발행했다. 3년물이 연 1.303%, 5년물이 연 1.714%, 7년물이 연 1.955%의 금리로 발행됐다. 창사 후 최저수준이다. 만약 기아가 발행금액을 늘려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로 주문을 낸 기관들도 채권을 받아간다면 이보다 발행금리가 상승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증액보다는 원하는 금리에 자금을 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SK매직도 최근 기아와 같은 이유로 증액 없이 사전에 계획한 1500억원어치의 회사채만 발행하기로 했다. 이 회사 역시 수요예측에서 모집액의 7배가 넘는 1조700억원의 투자수요를 확보했음에도 조달금액 확대 대신 저렴한 금리를 택했다. 롯데푸드 역시 11.1대 1의 청약경쟁률을 기록하고도 처음 계획했던 대로 회사채시장에서 700억원만 조달했다. 기업 대부분이 수요예측에서 흥행한 뒤 채권 발행규모를 대폭 늘린 지난 1~2월과는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엔 금리 변화가 있다. 올 들어 물량 확대 우려로 국고채 금리가 지속적으로 오르는 가운데서도 회사채 금리가 빠르게 하락하면서 기관들이 금리를 대폭 낮춰가면서까지 회사채 매수에 나서기 어려워진 것이다. 지난 4일 민간 채권평가사들이 시가평가한 3년 만기 AA-등급 회사채 평균금리는 연 1.354%로 같은 만기의 국고채와의 금리 격차가 0.319%포인트에 불과하다. 지난해 6월초 해도 0.777%포인트까지 벌어졌던 금리 격차가 빠른 속도로 좁혀지고 있다. 이제는 과거처럼 대규모 투자수요가 모였다고 해서 수요예측에 참여한 기관 대부분이 발행기업의 희망금리보다 낮은 금리로 주문한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조달금액 확대와 낮은 금리를 모두 잡기가 쉽지 않아졌다는 평가다.

CFO들로선 “유동성을 최대한 끌어모으는 게 우선”이라고만 고집할 수 없게 됐다. 일단 백신 보급 등으로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차츰 진정되면서 곳간에 비상금을 대거 축적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경기 회복 신호와 함께 나타난 인플레이션 가능성으로 금리 상승 전망에 힘이 실리는 것도 변수다. ‘지금이 사상 최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달금액보다는 조달비용이 CFO의 업적이 될 수 있는 시기인 셈이다. 대형 증권사 기업금융 담당임원은 “당분간은 얼마나 저렴하게 자금을 빌려올 수 있느냐가 기업 재무담당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될 것”이라며 “기관들도 앞으로는 발행기업이 증액을 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회사채 매수전략을 짤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