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 속 ‘환희의 신’이다. 그는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다. 야생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무덤가에 꽂았다. 무덤에서 자라난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저장한 후 까마득히 잊었다. 이후 우연히 저장 포도가 술로 변한 걸 발견했다. 술은 마법처럼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디오니소스는 지중해를 떠돌며 인간에게 포도 재배법과 양조법을 전파했다. 인류 최초의 과실주, 와인의 유래에 얽힌 전설이다.

7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와인은 세계인이 즐기는 술이 됐다. 종교와 예술을 넘나들며 역사의 순간마다 와인이 있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유럽 각국에선 자연스럽게 음식과 함께 즐기는 음료로 녹아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와인은 오랜 시간 ‘어려운 술’이었다. 잘 차려입고 낯선 음식을 앞에 둔 채 마셔야 하는 번거로운 술로 여겨졌다. 국적과 이름, 품종은 왜 이렇게 많은지…. 공부하듯 마셔야 할 것 같은 심리적인 부담감 때문에 20여 년간 와인은 마니아 영역에 머물렀다.

2020년, 와인은 비로소 하루를 마무리하는 술이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진정한 ‘와인 황금기’를 불러왔다. 지난해 국내 수입량은 전년보다 20% 이상 늘어나며 역대 기록을 깼다.

와인은 더 이상 골치 아픈 술이 아니다. 저녁 식탁에, 가족이나 친구와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술로 자리잡았다. 퇴근 무렵 편의점과 마트, 동네 와인숍에서 그날의 음식과 함께할 와인을 고르는 건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됐다. 와인을 고르는 방법도 달라졌다. 어느 지역, 어느 품종, 어떤 브랜드를 찾기보다 ‘이런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이 더 많아졌다.

누군가 ‘당신은 와인을 좋아하는가’ 묻는다면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해보라. 나는 와인 한 모금으로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는지, 혀끝에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지를.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이냐’고 물었을 때 ‘진정 좋은 와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시는 와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품종·라벨에 주눅든 당신…일단 부딪쳐라, 와인이 보인다

와인과 친해지고 싶은 이들을 위한 입문서

단맛 없는 카베르네 소비뇽
부드러운 메를로와 피노누아
대표 품종만 알아도 절반 성공

와인은 ‘특별한 날에 마시는 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가성비 좋은 와인이 많이 나오면서 대중화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쉽게 접근할 수 없고 어려워 보이는 것이 와인의 세계다. 매력적인 와인의 맛에 흠뻑 빠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본을 조금만 이해하면 된다.

카베르네 소비뇽 등 대표 품종 알아야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앙드레 뤼통 와이너리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앙드레 뤼통 와이너리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와인을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다. 좋은 레드와인은 신맛, 단맛, 떫은맛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 조화 속에 맛의 깊이, 당도 변화에 따라 개성이 생긴다. 수백 종에 이르는 포도 품종을 모두 알 필요는 없지만 대표 품종 몇 개만 기억해도 입맛에 맞는 와인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된다.

레드와인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피노누아’ 등 세 개의 품종이 가장 유명하다. ‘포도의 황제’라고 불리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세계 와인 시장에서 제일 많이 거래된다. 푸른빛이 감돌고 단맛이 없으며 숙성될수록 깊고 중후한 맛으로 변한다. 메를로 와인은 과일 향이 강하다. 순하고 매끄럽게 넘어가 여성이나 와인 초심자에게 적합하다. 숙성이 빨라 수확 연도가 오래된 것보다는 신선한 것이 좋다.

피노누아는 아무 토양에서나 자라지 않는 도도하고 까다로운 품종이다. 토양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같은 마을, 심지어 같은 밭에서 재배했더라도 맛이 다른 경우가 많다. 재배가 쉽지 않지만 성공하면 최고의 와인 원료가 된다. 흙, 송로버섯, 낙엽의 향미와 혀에 감기는 부드러운 촉감은 가장 럭셔리한 품종으로 만들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로마네꽁띠’도 피노누아로만 만들어진다.

이 밖에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리는 쉬라즈, 산지오베제, 진판델 등의 품종도 추가로 알아두면 더 좋다. 화이트와인용 포도 품종 중에서는 ‘샤르도네’ ‘소비뇽블랑’ ‘리슬링’ 정도는 기억해두자. 우아하게 분위기를 잡고 싶다면 달달한 청량함이 가득한 ‘모스카토’를 권한다. 복숭아향, 사과향, 레몬향이 가득하고 스파클링이 있다. 와인을 선택하는 데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입에 잘 맞는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인 행사 때 앞쪽에 진열된 상품 노려라

위로 한잔이 고픈 오늘…퇴근후, 와인 맛집으로 간다
와인 가격이 합리적인지 궁금하다면 와인서처(Wine searcher), 비비노(Vivino) 등 유명 와인 홈페이지를 활용하자. 소비자 가격은 통관비, 창고 보관비 등이 붙으므로 현지가의 두 배 정도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와인 수입업체 아영FBC의 변원규 팀장은 “백 화점, 대형마트 등에서 할인 행사를 하면 눈에 잘 띄도록 코너 맨 앞에 진열된 행사 상품을 눈여겨보라”고 조언한다.

와인에 대해 정말 모르겠다 싶으면 일단 와인병을 주목하자. 와인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병목 바로 아래 남성의 어깨처럼 살짝 각진 병이라면 남성적이고 드라이한 보디감이 있다. 반면 모양이 아래로 갈수록 넓은 병의 와인은 향이 좋고 스위트하다. 와인을 어느 정도 마셔본 이라면 보르도산과 부르고뉴산의 맛을 비교해서 마셔보는 것도 좋다. 같은 와인이라도 빈티지(vintage·수확 연도)를 기준으로 풍작일 때의 와인과 그렇지 않을 때의 맛이 미묘하게 다르니 비교하면서 마시는 것도 와인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방법이다.

명사들이 사랑한 와인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위로 한잔이 고픈 오늘…퇴근후, 와인 맛집으로 간다
재계 총수 중에서 남다르게 와인을 사랑했던 이는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었다. 이 회장이 가장 좋아했던 와인은 샤토 라투르 1982.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1982년산 샤토 라투르를 마신 후 100점 만점을 주며 “입안에 남는 잔향은 영원할 듯 지속되며, 2040년까지 두고 마셔도 괜찮을 와인”이라고 극찬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위로 한잔이 고픈 오늘…퇴근후, 와인 맛집으로 간다
와인 마니아로 잘 알려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산 와인. 그중에서도 캔달 잭슨의 카디널 1998년산을 특히 선호한다. 카디널은 잭슨 패밀리의 대표적 와인 메이커인 크리스토퍼 카펜터가 나파 산악지역에서 수확한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이용해 생산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위로 한잔이 고픈 오늘…퇴근후, 와인 맛집으로 간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서 생산되는 사시카이아와 티냐넬로를 좋아한다. 이탈리아 고급 와인의 선두주자로 ‘슈퍼 투스칸(Super Tuscan)’이라 불린다. 토스카나 방언으로 ‘돌밭’ 이라는 뜻의 사시카이아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와인이다. 한 병에 30만원이 넘는다.

히딩크·배용준

위로 한잔이 고픈 오늘…퇴근후, 와인 맛집으로 간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유독 한 와인만 즐겨 마셨다. 프랑스의 샤토 딸보다. 연예계의 대표적 와인 마니아인 배용준 씨는 결혼식 때 교황청에서 마시는 최고의 프랑스 만찬 와인 끌로생장 샤토네프 뒤 파프를 사용해 화제가 됐다. 배씨가 즐겨 마시는 와인은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최고급 와인인 도멘드라 로마네콩티2005로 알려져 있다.

김보라/최병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