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한 폭의 그림이 시대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영국인이 사랑하는 화가 윌리엄 터너는 산업혁명의 도도한 흐름을 ‘전함 테메레르’로 표현했다. 석양을 배경으로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거대한 범선이 새로운 기술을 의미하는 작은 증기선에 쓸쓸하게 끌려가는 모습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의 도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글로벌 기술기업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세계 최대 IT(정보기술)·가전 전시회 ‘CES 2021’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증기선이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전환임을 웅변하고 있다. CES 주관사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가 사상 처음으로 ‘올(all) 디지털’ 전시회 모델을 선보인 것부터 역사의 한 장면이다.

딜로이트글로벌은 “기술이 코로나19와 전쟁을 벌이면서 5년 걸릴 변화를 5개월로 단축했다”고 평가했다. 맥킨지앤드컴퍼니는 ‘넥스트 노멀 시대’ 보고서에서 “코로나19가 촉발한 비대면 이코노미로 데이터가 폭증하면서 AI 활용과 디지털화가 유례없는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며 2021년을 ‘전환의 해’로 정의했다.

코로나19가 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스가 말한 패러다임의 전환점, 새로운 기술혁명이 대세로 바뀌는 시점을 앞당긴 것이다. 기술혁명은 역경과 함께 찾아왔고 인류는 이를 극복하며 진화해왔다.

CES 2021 미디어데이에 나서는 글로벌 기업들은 코로나19로 지친 소비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예고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모두를 위한 보다 나은 일상’, LG전자의 ‘보다 편안하고 생산적인 생활’이 대표적인 사례다. 보쉬의 ‘건강과 가정, 이동성을 위한 기후 친화적 솔루션’, 파나소닉의 ‘우리 모두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술’도 마찬가지다.

기조연설도 같은 흐름이다. 한스 베스트베리 버라이즌 최고경영자(CEO)는 5G를, 메리 배라 제너럴모터스(GM) CEO는 전기자동차를 키워드로 내세울 계획이다. 코리 배리 베스트바이 CEO는 다양성과 포용의 중요성을, 줄리에 스위트 액센츄어 CEO는 코로나19 이후 다시 상상해본 미래 10년을 설명할 예정이다.

CES 2021 온라인 세션 주제도 ‘넥스트 노멀’ 기대를 표출하고 있다. ‘AI의 파워’가 세션 첫 타자인 것부터 그렇다. 세션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키워드는 ‘차세대’ ‘혁신’ ‘미래’ ‘변혁’ ‘전환’ ‘탐색’ ‘기회’ 등이다. 마치 17~18세기 산업혁명을 문명적으로 뒷받침한 19세기 근대경제의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안현실 AI경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