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커니 파트너, 성장 한계 넘으려면 오픈 플랫폼 활용하라
미세공정 개발을 계속해야 하는 반도체 기업, 신약 개발을 하는 제약사 등은 연구개발(R&D)에 전사적으로 매달린다. 조금만 뒤처지면 경쟁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이들 기업에서는 요즘 새로운 R&D 방식이 트렌드로 떠올랐다.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오픈 플랫폼 R&D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합치는 것이 오픈 플랫폼 R&D의 핵심이다. 경쟁력 있는 기업과 협업해야 더 큰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은 노광장비업체인 네덜란드 ASML과 협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코로나19 백신 개발에서도 JD(공동개발·joint development) 방식이 활발하다.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와 영국 옥스퍼드대의 산학협력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협업은 기존에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성의 불균형, 지리적 한계, 기술보안 등의 문제로 제한적인 분야에서만 이뤄졌다. 단적인 예가 1982년 글로벌 반도체산업 내 미국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대학 연구능력 활용을 목적으로 설립된 SRC(Semiconductor Research Corporation)다. 북미에 국한한 물리적 한계, 제한적 공유에 따른 개발 지연, 인력 이탈 시 데이터 유출 위험 등으로 큰 성과를 내진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클라우드 기반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등의 기술이 융합되면서 ‘디지털 플랫폼’이 가능해졌다.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는 최적의 개발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세계 1위 사업자 TSMC는 클라우드 기반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과 가상 팹을 활용해 고객과 지식재산권(IP) 제공업체, 디자인 하우스를 연계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설비와 소재업체까지 더해 협업을 강화하고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독일 제약사 머크는 미국의 빅데이터 분석 기반 소프트웨어업체 팔란티어와 손잡고 암 데이터 플랫폼을 활용해 암 치료제 연구를 가속화했다.

이런 디지털 기반 R&D 플랫폼은 각각의 전문성을 활용하면서도 필요한 정보만 획득하게 함으로써 기업의 영업기밀과 핵심 기술을 보호할 수 있는 게 강점이다. 이를 통해 R&D의 질적, 속도적 측면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다.

국내의 선도 기업들 역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관련 산업 분야에서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오픈 이노베이션’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폐쇄된 개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