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공개(IPO) 업무를 담당하는 투자은행(IB) 뱅커들은 매년 200여개 기업의 CFO와 접촉한다. 이들은 CFO의 '민낯'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상장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면 CFO가 안고 있는 고민, 즉 기업의 약점과 위험 요인을 숨김없이 털어놓아야하기 때문이다.

IB 뱅커들이 CFO 개개인의 특징과 업무 스타일, 기업 문화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이 함께 일하기 싫은 최악의 CFO로 꼽은 사례를 소개한다.

③ 휴일에도 일하게 만드는 CFO

증권사 IPO 담당자들은 이번 추석 때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기업가치가 수십조원에 이르는 '대어' D사가 상장 주관사 선정을 위한 입찰제안요청서(RFP)를 발송했기 때문이다. D사가 제시한 데드라인은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 주. 휴일을 제외하면 워킹데이로 불과 2주일 밖에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요청 사항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 회사가 증권사에 보낸 요청서는 10여페이지. 제안서에 들어가야할 내용이 빼곡히 기재돼 있었다. 반드시 적어야하는 핵심 내용만 개략적으로 제시하고 나머지는 증권사의 재량에 맡기는 다른 기업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D사 CFO가 글로벌 증권사에서 IPO 업무를 담당했던 베테랑이었던 탓에 깐깐한 기준을 내세운 것이다.

이 회사 CFO는 기업가치 산정 방식과 이유, 미래 실적 예상치와 근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했다. 또 향후 주관사로 선정돼 공모 절차에 돌입했을 때, 입찰제안요청서에 제시한 기업가치를 그대로 견지하도록 요구했다. 주관사 계약을 따내기 위해 증권사들이 경쟁적으로 기업가치를 부풀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취지다.

만약 프레젠테이션 때 제시한 기업가치보다 공모가가 낮게 결정될 경우 증권사가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까지 제안서에 포함하도록 알려졌다. IB 뱅커들은 기업가치를 낮게 적었다가는 떨어질테고 높게 적었다가는 후폭풍이 두려워 고민에 빠졌다.

D사 CFO는 그동안 증권사가 수행한 상장 주관 실적과 저조한 흥행 성적에 대처할 리스크 대응책까지 상세하게 쓸 것도 요청했다. 관련 업종을 상장시켜본 경험이 없는 증권사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또 해외 상장을 추진할 경우 주관사가 생각하는 전략와 예상 시나리오에 대해서 제시하라고 했다.

증권사들은 요구사항에 맞는 제안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개천절까지 끼어있어 5일 간 휴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쉴 수 없었던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팀원 한명은 추석 당일 하루만 빼놓고 매일 출근해 보고서를 만들었다"며 "업무량을 뻔히 알면서 촉박한 일정을 주고 일을 요청하는 CFO와 일할 때가 가장 싫다"고 말했다.

④ 힘 없이 휘둘리는 CFO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F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큰 타격을 입었다. 올해 매출은 반토막이 났고 영업이익도 전년보다 급감했다. 계획대로 상장을 강행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IPO 담당자는 F사 CFO에게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상장 일정을 보류하라고 조언했다. 재무건전성을 개선하지 않는 한 당분간 상장이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런 상황은 CFO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영진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룹 오너는 공모주 시장이 호황일 때 상장을 서둘러야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F사 CFO는 "다른 증권사의 자문을 받아보고 오겠다"고 했다.

G사 CFO도 윗선의 눈치만 보느라 일처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케이스다. G사는 최근 취임한 신임 대표이사가 상장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그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은 모두 무시하고 본인이 세부 사항을 모두 챙기겠다고 나섰다.

신임 대표이사는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증권사를 배제했고 자신이 원하는 회사들에만 주관사 선정 프레젠테이션 기회를 줬다. 이 회사 CFO는 수년 동안 IB 뱅커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상장 준비작업을 했음에도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동안 함께 일한 증권사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진행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IB들은 뒤늦게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 증권사 IPO 담당 임원은 "성공한 IPO 딜을 보면 대표이사와 CFO, 주관사가 두터운 신뢰 관계로 맺어진 경우가 많다"며 "CFO가 회사와 주관사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제대로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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