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폭로' 특검수사로 2008년 4월 일선퇴진
평창올림픽 유치 위해 2010년 사면 복귀
말년까지 괴롭힌 상속분쟁, 형제간 화해 끝내 물거품
[이건희 별세] 이건희 누구인가④ 일선퇴진→복귀…평탄치 않았던 총수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은 건강문제와 사내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의 사내 비자금 '폭로'로 검찰 수사를 받는 등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특검수사 곤혹
이건희 회장은 1999년에는 폐 부근의 림프절에 암세포가 발견돼 수술을 받았지만, 폐에 물이 차는 폐수종 증상이 나타났다.

추위만 느껴도 고열이 발생하는 현상이 나타나 겨울이면 하와이, 오키나와 등 따뜻한 지역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다.

이 회장은 검찰과 특검 수사도 각각 한 차례 받으면서 홍역을 치렀다.

1995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 당시 대검 청사로 불려가 중앙수사부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2003∼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와 2005년 안기부 X파일 도청사건 수사 당시에는 소환될 위기를 넘겼으나 2008년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비자금 조성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로 다시 조사를 받았다.

삼성 비자금 수사는 이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놓고 2선으로 물러나는 계기가 됐다.

특검 수사는 자연인 이건희는 물론 삼성에도 최대 위기였다.

그에 앞서 2005년에는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삼성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1997년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이 신라호텔 일식집에서 나눈 대화를 도청한 이른바 X파일은 떡값 검사 실명이 등장하면서 재계와 법조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2007년 10월에는 삼성그룹 옛 구조조정본부(당시 전략기획실)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이 회장의 지시로 금품 로비를 하고 자신 명의의 비밀계좌로 50억원대의 삼성 비자금이 관리됐다고 폭로했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성당에서 잇따라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는 2000년부터 끌어오던 경영권 편법승계 의혹과 맞물리면서 메가톤급 파장을 불러왔다.

'삼성 비자금 특검법'이 제정된 뒤 2008년 초 출범한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삼성 관련 의혹들을 수사한 뒤 경영권 편법승계에 이용된 에버랜드 전환사채(CB)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배임), 조세포탈 등 3가지 혐의로 이 회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 과정에서 이 회장이 관리해온 4조5천억원대의 차명재산도 드러났다.

수사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은 2008년 4월 13년 만에 다시 조사를 받았다.

그에 앞서 부인 홍라희 여사도 조사를 받았다.

미술품 창고에서 나온 '행복한 눈물'이 한동안 화제가 됐다.

미국 팝아트 대표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다.

이 회장은 기소 직후인 2008년 4월 자신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지배구조 개선방안 등이 포함된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4월 22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입사 후 42년의 절반인 21년간 그룹 회장을 맡아온 그의 퇴진은 그룹 안팎에 큰 충격을 줬다.

재판 결과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관련 혐의(배임)엔 무죄가 선고됐으나 나머지는 유죄가 인정돼 이건희 회장은 2009년 8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천100억원이 확정됐다.

하지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재계와 체육계 등의 건의에 힘입어 유죄 확정 4개월 만에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단독 사면을 받았다.

이 회장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인 2010년 3월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이 회장은 경영 복귀의 변으로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연간 영업이익은 특검 수사를 받던 무렵 6조원에서 이건희 회장이 복귀한 2010년 17조원으로 2년 만에 3배로 불어났다.

최대 위기가 도리어 조직을 재정비하고 긴장감을 불어넣음으로써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이건희 별세] 이건희 누구인가④ 일선퇴진→복귀…평탄치 않았던 총수
◇ 끝까지 괴롭힌 상속 분쟁…무노조 경영 고집도
삼성 특검의 파장이 지나고 나서 이 회장이 경영 일선에 돌아온 뒤로 다시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삼성가 형제간의 상속 소송이었다.

이 회장의 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누나인 숙희 씨 등은 이 회장의 차명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1조원대 소송을 제기했다.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을 이 회장 명의로 실명 전환해 독식하려 했다는 것이다.

상속 분쟁은 이맹희 씨 아들인 이재현 회장이 있는 CJ와 삼성의 그룹 간 갈등으로 비화하는 양상을 빚기도 했다.

삼성가 상속 소송은 1, 2심에서 맹희 씨 측이 잇따라 완패하고 맹희 씨가 고심 끝에 상고를 포기하면서 이 회장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형제간 소송은 마지막까지 이 회장의 심신을 크게 압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송 도중 형제간 화해의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적절한 방법론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다 결국 물거품이 됐다.

이건희 회장은 1996년 신년사에서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기업도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밝히면서 사회공헌에도 앞장섰다.

이 회장의 사회적책임(CSR) 강조는 기업공유가치 창출(CSV)로 이어졌다.

그러나 노동조합에 관한 한 이 회장은 타협이 통하지 않는 자본가였다.

'노조가 있는 회사보다 처우나 복리 후생이 더 좋게 하겠다'는 긍정적인 취지라는 게 삼성의 설명이지만, 선대회장 때부터의 지론은 '파괴하는 노조, 거저먹는 노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삼성의 유명한 '무노조 경영 철칙'이었다.

이재용 부회장 체제로 들어서며 최근 삼성 노조가 설립되며 무노조 체제도 막을 내렸지만 이건희 회장 당시 무노조 경영은 노동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과 삼성전자 회장 외에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1981년),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1982∼1997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1987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1993∼19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1996년) 대한레슬링협회 명예회장(1997년),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 회장(1998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특별고문(2002년), KOC 이사(2009년) 등을 지내며 경제계, 체육계 등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그동안 받은 훈포장·포상으로는 체육포장, 체육훈장 맹호장, 체육훈장 청룡장, IOC 올림픽훈장, 한국경영학회 경영자대상, 한국무역학회 무역인대상, 마거릿 미드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세계안내견협회 공로상,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상, 홍콩 산업기술통상부 디자인경영자상,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 밴 플리트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년)를 남겼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