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어음(CP) 시장이 주요 기업의 대체 자금 조달처로 급부상하고 있다. CP 시장은 주로 기업들이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자금 조달을 위해 찾던 곳이었지만 최근에는 이보다 훨씬 긴 2~3년 만기로도 이 시장에서 자금을 빌리는 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실적 악화로 차입 여건이 나빠지자 비교적 수월한 자금 조달방식을 찾고 있다는 평가다.

1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호텔롯데는 오는 21일 3년5개월 만기로 1500억원어치 CP를 공모로 발행할 계획이다. 이번 CP는 이자(연 2.25%)를 미리 액면가격에서 차감하는 방식으로 발행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1384억원이 회사로 유입된다. 호텔롯데는 이번에 조달한 자금을 내년 2월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상환에 쓸 예정이다. 이 회사는 지난 7월 창사 이후 처음으로 공모 CP(3000억원)를 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이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유동성을 끌어모으고 있다. 어느덧 CP 발행잔액이 1조1500억원(13일 기준)에 달하고 있다.
[한경 CFO Insight] CP 시장으로 달려가는 기업들

다른 롯데그룹 계열사들도 올 하반기부터 활발하게 CP 시장을 드나들고 있다. 롯데쇼핑(2000억원) 롯데글로벌로지스(1500억원) 부산롯데호텔(1500억원) 롯데하이마트(1000억원) 코리아세븐(1000억원) 등이 지난 7~8월 잇달아 2년 이상의 만기로 공모 CP를 발행했다. 롯데쇼핑을 제외하곤 모두 설립 이후 처음으로 공모 CP 시장에 발을 들였다.

롯데그룹 외에도 적잖은 기업이 최근 CP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현대캐피탈(5000억원)과 신한카드(3000억원), 현대커머셜(2600억원) 등 여러 금융회사가 지난 7월 이후 만기 2년이 넘는 CP를 발행해 수천억원을 조달해갔다. 식자재업체인 아워홈(500억원)과 중견 건설사 한라(300억원)도 비슷한 만기로 CP를 발행했다. CP 시장을 찾는 기업들이 늘면서 지난해 말 51조5670억원이던 국내 기업의 CP 발행잔액은 13일 62조7601억원까지 불어났다.

기업들은 투자심리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비교적 수월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이유로 CP 시장을 찾고 있다. CP는 만기가 1년 이상이면 증권신고서를 제출하고 공모 과정을 거쳐 발행해야 하지만 기관투자가들을 상대로 한 수요예측(사전 청약)을 진행할 필요는 없다. 발행 후 1년 동안 보호예수 조건을 걸어두면 만기가 1년이 넘더라도 사모로 발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은행 대출이나 회사채 발행보다 조달과정이 간편하면서도 발행기업에 대한 평판도 덜 노출된다.

자금 조달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다. 지난 13일 91일 만기 A1등급 CP 평균금리는 연 1.11%로 지난 4월 2일(연 2.23%) 이후 6개월여간 1.12%포인트 떨어졌다. 한국은행의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등 정부의 대규모 유동성 공급에 힘입어 CP 시장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는 평가다. 반면 회사채 금리(3년 만기 AA-등급)는 여전히 6개월 전과 큰 차이가 없는 연 2.2%대에서 움직이고 있다.

회사채시장에서의 평판이 이전만 못한 기업이 CP 시장에서 자주 눈에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CP 발행에 적극적인 롯데쇼핑과 호텔롯데는 회사채시장에서 실제보다 낮은 신용도로 평가받은 지 오래다. 두 회사의 채권에 붙는 장기 신용등급은 10개 투자적격등급 중 세 번째로 높은 ‘AA’지만, 현재 민간 채권평가사들이 시가평가한 롯데쇼핑(3년물 기준 연 1.780%)과 호텔롯데(연 1.859%)의 회사채 금리는 두 단계 아래인 A+등급 회사채 평균금리(연 1.831%)와 비슷한 수준이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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