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인더스트리 임원들은 장희구 사장과 골프를 칠 때 부쩍 긴장한다. 컨시드(일명 OK)를 주지 않아 짧은 퍼팅 거리라도 홀 컵에 공을 끝까지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목 골프를 칠 때처럼 실수를 눈감아주는 일도 드물다. 장 사장의 깐깐한 골프 습관은 일본 지사에서 10년간 근무하며 생겼다.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일본 사람들과 라운딩하면서 자연스레 몸에 배었다.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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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통해 임원들에게 자신의 경영철학을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장 사장은 코오롱인더스트리의 주력인 소재사업 경쟁력도 이런 깐깐함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는 “신뢰가 생명인 소재사업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넘겨선 안 된다”며 “지독한 디테일과 끈기야말로 소재회사의 핵심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마늘 냄새 난다’ 수모 겪기도

1986년 코오롱에 입사한 장 사장은 영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3년 만에 그룹 사업을 총괄하는 경영기획실로 자리를 옮겼다. 승진이 보장된 자리였지만 장 사장은 다른 길을 택했다. 상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1994년 일본 도쿄사무소에 지원했다. 그는 “일본 근무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며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기보다 한 분야에 정통한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는 일본 기업들이 ‘절대 갑(甲)’이던 시절이었다. 소재부터 장비까지 모두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던 터라 한번 관계가 틀어지면 사업을 하기 어려웠다. 그는 처음 일본 회사를 방문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추운 겨울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일본인 직원들이 “마늘 냄새가 난다”며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모욕감을 느꼈다. 장 사장은 “일본인들은 상대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면 잘 가르쳐주는 경우가 많다”며 “인내심을 갖고, 한 수 배운다는 자세로 대하니 관계가 자연스럽게 좋아졌다”고 회상했다.

가장 인상적인 회사는 도레이다. 대부분의 일본 회사가 꼼꼼함을 강조하지만 도레이는 차원이 달랐다. 장 사장은 “도레이는 자체 기술을 개발해 끊임없이 보완하고 수익이 날 때까지 30년을 기다린다”며 “끈기와 꼼꼼함이 세계 1위 첨단소재회사로 올라선 비결”이라고 말했다. 장 사장은 2008년 도쿄지사장 발령을 받아 9년 만에 다시 일본에 건너갔다. 그동안 한·일 관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국 기업은 더 이상 일본 화학업체들로부터 원료를 수입하지 않을 정도로 기술력이 높아졌다. 대등한 관계에서 사업을 논의할 수 있게 됐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도 겪었다. 장 사장은 “사무실 벽이 갈라지는 걸 보고 거리로 뛰어나오면서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코오롱과 자매결연을 맺은 센다이이쿠에이고등학교를 떠올렸다. 장 사장은 여진이 계속되는 후쿠시마 인근의 센다이로 달려갔다. 이재민들에게 의류를 나눠주고 직접 고기를 구워 먹였다. 한국 기업 중에서 가장 먼저 재난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이는 일본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어려울 때 돕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는 믿음을 주며 일본 회사들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젊은 사원들 아이디어에 미래 달렸다

그는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파나소닉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을 꼽았다. 그의 자서전을 여러 번 읽고 인재가 곧 회사의 경쟁력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다고 한다. 장 사장은 코오롱인더스트리와 SKC가 합작해 설립한 SKC코오롱PI를 세계 1위 폴리이미드필름 업체로 성장시키는 데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합작 13년째인 올해 3월 SKC코오롱PI 지분 약 27%를 매각해 3035억원을 확보했다. 이를 기존 사업 고도화와 미래 성장동력 확충에 투자할 계획이다. 장 사장은 “발상을 바꿔 사람을 늘리더라도 그만큼 성과를 내면 된다고 생각했다”며 “미개척 시장이었던 중동과 아프리카를 새로 공략한 게 실적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장 사장은 코오롱플라스틱에서 보여준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2018년 그룹 핵심 계열사인 코오롱인더스트리 대표가 됐다. 하지만 회사를 둘러싼 경영환경은 녹록지 않다. 석유·화학산업의 불황이 길어지자 바스프, 도레이 등 세계적인 기업들은 첨단소재 등 고부가가치 소재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있다.

장 사장은 “업계의 생태계와 밸류체인(가치사슬)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며 “아람코 등 정유업체들이 화학산업으로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기존 석유화학 업체들이 하지 못하는 영역을 찾아내야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쇼 CES에 다녀온 것도 이런 절박함 때문이다. 장 사장은 “미래 모빌리티(이동수단)를 중심으로 한 사회가 예상보다 빨리 올 것”이라며 “관련 소재 사업 투자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장 사장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코오롱플라스틱 대표를 맡아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에 사용되는 고부가가치 제품 판매 비중을 높여 회사를 성장시켰다. 그의 취임 이전인 2013년 13억원에 불과했던 코오롱플라스틱의 영업이익은 2018년 14배 이상 늘어난 193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임직원 수도 206명(2013년)에서 313명(2018년)으로 51.9% 늘었다.

코오롱인더스트리의 양대 성장동력은 슈퍼섬유로 불리는 아라미드와 투명 폴리이미드필름이다. 아라미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수요가 늘어나 추가 증설을 검토 중이다.

투명폴리이미드 필름은 폴더블폰 등의 디스플레이 표면에 부착하는 소재다. 폴더블폰 출시와 함께 매출이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장 사장은 “ 밸류체인 자체가 초기 단계여서 아직 공급망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며 “폴더블폰에서 롤러블(감을 수 있는) TV, 곡면 모니터 등으로 시장이 계속 확대되면서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장 사장은 최근 젊은 직원들의 아이디어에 더 관심을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젊은 사원들을 중심으로 사내 벤처를 활성화하고 실제 사업으로 추진하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다. 사내 벤처 발표회 때는 맨 앞 자리에 앉아 질문을 던진다. 사장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들이 더 힘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장 사장은 “사내 벤처에서 전통 제조업 기반에서 생각할 수 없었던 아이디어들이 쏟아진다”며 “산업의 구조와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시기에 젊은이들의 아이디어와 에너지만큼 중요한 자산은 없다”고 말했다.

훅 들어온 '비대면 시대'
'슈퍼섬유' 아라미드 특수
코오롱인더 추가증설 채비

'Mr. 디테일' 장희구 코오롱인더스트리 사장 "아라미드·CPI 등 '미래 첨단소재' 집중할 것"
장희구 코오롱인더스트리 사장이 최근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아라미드’ 섬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비대면 시대’를 앞당기면서 5세대(5G) 이동통신 광케이블 소재로 사용되는 아라미드 섬유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올 3월 아라미드 생산공정 증설을 완료한 지 4개월도 안 돼 추가 증설을 추진하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연 7500t의 생산 능력을 갖춘 국내 1위, 세계 3위(생산량 기준)의 아라미드 업체다. 장 사장은 “추가 증설을 통해 급증한 수요에 대응하고 국내 압도적 1위 자리를 굳힐 것”이라며 “세계 시장에선 글로벌 1, 2위인 미국 듀폰과 일본 데이진을 따라잡는 게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아라미드는 약 1.6㎜ 두께의 한 가닥으로 350㎏ 이상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다. 동일한 두께·무게의 철보다 강도가 다섯 배 세고 섭씨 500도에서도 녹지 않는다. 아라미드가 ‘슈퍼섬유’로 불리는 이유다. 이런 특성 때문에 아라미드는 방탄복, 방탄헬멧 등 군사용 소재로도 사용된다.

코오롱은 197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손잡고 아라미드 국산화에 나섰다. 26년간의 연구 끝에 2005년 국내 최초로 아라미드 생산에 성공했다. 세계에서 세 번째였다. 코오롱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힘을 상징하는 영웅 헤라클레스와 나일론을 합친 ‘헤라크론’이라는 브랜드로 본격적인 아라미드 생산에 나섰다.

2009년 미국 듀폰이 코오롱에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아라미드 생산이 잠시 주춤했지만 2015년 양사 합의 후 아라미드는 회사의 대표적인 ‘효자 상품’이 됐다. 현재 아라미드의 영업이익률은 20% 후반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라미드는 코로나19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재택근무 문화가 확산하면서 5G 통신용 광케이블 수요가 늘어난 덕분이다. 광케이블을 설치하려면 광섬유를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통신량 증가에 따른 발열도 견뎌야 한다. 내열성이 뛰어난 고강도의 아라미드 수요가 급증하는 이유다. 지난 1분기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생산해 수출한 아라미드는 분기 기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 장희구 코오롱인더스트리 사장

△1959년 울산 출생
△1986년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1986년 코오롱 입사
△1999년 코오롱 경영기획팀
△2008년 코오롱 도쿄사무소
△2014년 코오롱플라스틱 대표이사(전무)
△2018년 코오롱인더스트리 대표이사(사장)


최만수/이선아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