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가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中企가 돌아본 소부장 1년
“위기란 불안감보다 기회라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1일 만난 반도체 장비제조업체 지오엘리먼트의 김대현 부사장(54)은 1년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소식 발표 때를 이같이 회상했다. 같은 날 만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업체 켐이의 김세훈 수석연구원(41)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 중소기업들에게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1일 일본 정부가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폴리이미드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3대 소재의 한국으로의 수출 규제를 대폭 강화한다고 발표한지 만 1년. 국내 소재·부품·장비 제조(소부장) 관련 중소기업 연구개발(R&D) 담당자들은 희망을 키워가고 있었다.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이를 제소하는 등 원상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제고정책을 추진해나갔다. 특별법을 마련하고 소부장 업체 지원을 위해 올해 2조원 넘는 특별회계를 편성했다.

"아베가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中企가 돌아본 소부장 1년
30년가량 국내 소재·부품·장비 분야에 몸담아온 김 부사장은 “과거에도 정부에서 수 차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외치며 R&D 등을 지원했지만 산업 경쟁력은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며 “한국 기업들이 따라잡지 못한 건 일본의 기술력이 아니라 ‘변경점’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변경점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장비나 소재가 바뀌는 시점이다. 특정 장비와 소재가 더 좋더라도 변경점에 따른 전환 비용이 높으면 대기업 입장에서는 변화를 꺼리고 쓰던 제품을 계속 쓰게 된다. 나노미터 단위의 미세공정에서 바뀐 소재·장비에 따른 불량 발생 가능성도 큰 부담이다.

김 부사장은 “오랜기간 시장을 선점해온 해외 선진업체 대신에 섣불리 국산 소재·부품·장비를 썼다가 문제가 생기면 이를 추진한 엔지니어들이 줄줄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노하우가 없어 국산을 외면하고 그래서 다시 노하우를 쌓을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돼왔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일본 수출규제는 대기업이 위험부담을 무릅 쓰고 국내 업체의 소재, 부품, 장비를 사용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10년 전 해외 장비 및 소재 수입에 부담을 느낀 국내 반도체 대기업들이 국내 업체에서 활로를 개척한 것이 소부장 발전에 큰 보탬이 됐다”며 “그 이상의 기회가 이번에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지오엘리먼트는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R&D 지원사업을 통해 미국, 일본 업체들이 20여년간 과점하고 있는 '스퍼터링 타겟' 국산화를 추진 중이다. 고순도 금속소재인 스퍼터링 타겟은 반도체 부품을 비롯해 디스플레이 등 각종 전자제품의 표면공정의 핵심소재다. 얇은 금속막을 씌우는 공정에 사용된다. 스퍼터링 타겟에 이온을 강하게 때려 금속 입자가 떨어져 나오도록 하는 방식이다.

2015년 설립된 벤처기업인 켐이는 지난해 9월 소부장 관련 정부 연구개발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한 디스플레이 대기업과 OLED 발광체를 개발하고 있다. 일본 JNC, 미국 UDC가 그간 시장 대부분을 잡고 있던 분야다. 김 수석연구원은 “우리같은 벤처기업들이 대기업과 협업할 기회를 갖는 건 사실 쉽지 않다”며 “일본 수출 규제 이후로 공급 안정화가 중시되면서 업계 분위기가 달라진 걸 체감한다”고 했다.

다만 이 같은 변화가 유의미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정부가 ‘축적의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수석연구원은 “정부 R&D 과제는 보통 3~4년 안에 끝나고, 기간이 끝나면 한동안 해당 분야에서는 지원사업이 잘 없다”며 “특정 분야가 지금은 조금 뒤처져있더라도 업데이트를 지속해야 다음 라운드라도 노려볼 수 있다”고 했다.

일본 미국 등 선진업체를 따라잡는 것 못지 않게 중국 등 후발주자들과의 기술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소재·부품·장비 지원 대책의 동력이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 수석연구원은 "한국의 OLED 기술력이 3~5년 내에 중국에 따라잡힐 수 있다는 업계의 우려가 많다"며 "경쟁국과의 기술격차를 벌리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뼈대가 되는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