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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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서 대기업 노키아가 무너지자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창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 말은 마치 노키아라는 대기업의 존재가 창업을 막고 있었다는 듯이 들린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창업을 대체적·적대적 관계로 보는 이 같은 시각은 과연 맞을까? 노키아가 부활을 위해 분투 중인 것과 노키아 출신이 스타트업 창업에 나서는 것은 결코 상호 모순적이거나 충돌적인 현상이 아니다.

대기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바꾸면 스타트업 창업과 대체적·적대적 악순환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동반적 선순환 관계를 얼마든지 그려볼 수 있다. 창업의 90% 이상은 대학이나 연구소가 아니라 기업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의 경우 창업의 95%가 기업에서 일어난다는 통계도 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대기업 재직 경험자의 창업이다.

◇ 대기업 출신 벤처 창업자들

벤처기업협회 임원사, 매출 1000억원 이상 벤처기업을 들여다보면 대기업 출신이 수두룩하다. 안건준 크루셜텍 대표이자 현 벤처기업협회장을 비롯해 이장규 텔레칩스 대표, 이재원 슈프리마 대표, 이세용 이랜텍 대표, 반호영 네오펙트 대표 등은 삼성전자 출신이다. 김철영 미래나노텍 대표는 삼성SDI, 김후식 뷰웍스 대표는 삼성테크윈 출신이다.

고광일 고영테크놀로지 대표는 LG전자, 유태경 루멘스 대표는 LG종합기술원 출신이다. 김원남 탑엔지니어링 대표, 최원 어보브반도체 대표는 LG반도체 출신이다.

벤처에서 출발해 대기업을 성장시킨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대표는 대우자동차 출신이고, 조송만 누리텔레콤 대표는 대우통신 출신이다.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대표, 이종진 코렌 대표, 민동욱 엠씨넥스 대표는 현대전자 출신이다. 이형환 모트렉스 대표는 현대자동차 출신이다. 정준 쏠리드 대표(KT), 장경호 이녹스 대표(새한), 조영탁 휴넷 대표(금호그룹)도 있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는 벤처에서 출발해 대기업이 된 네이버의 전신 NHN 출신이다. 잘 알려진대로 네이버의 출발은 삼성SDS 사내벤처 1호 웹글라이더팀이었다. 웹글라이더는 네이버컴으로 분사해 독립했고 이해진 창업자는 이후 한게임과 합병해 NHN, 지금의 네이버를 일으켰다. 한게임 창업자는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와 삼성SDS 입사동기인 김범수 현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다. 그는 NHN에서 나와 카카오톡을 냈고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해 다음카카오, 지금의 카카오를 일궜다. 삼성, 네이버, 카카오, 우아한형제들은 이렇게 얽혀있다.

◇ LG화학·삼성종기원…바이오 창업사관학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부상하고 있는 바이오 창업에서도 삼성그룹, LG화학 등 대기업 출신의 활약이 눈부시다(5월 26일자 한경 A13면 참조). 보도에 따르면 삼성그룹 출신 들이 창업한 회사들은 의료기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삼성종합기술원 출신 김현준 뷰노 대표, 김진한 스탠다임 대표, 이문수 이노테라피 대표, 삼성전자 출신 최종석 라메디텍 대표 등이다.

LG화학은 2000년대 이후 대기업 샐러리맨의 바이오 창업 열풍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바이오창업사관학교로 불릴 정도다. 최호일 펩트론 대표, 김용주 레고켐바이오 대표, 손미진 수젠텍 대표, 이정규 브릿지바이오 대표 등이다. 크리스탈지노믹스, 알테오젠, 파멥신, 피씨엘 등도 창업자 또는 대표가 LG화학 출신이다. 국산 의약품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은 LG화학의 항생제 ‘팩티브’를 개발한 경험이 창업 밑천이 됐다는 분석이다.

◇ 주목받는 대기업 사내벤처 플랫폼

기포드 핀쇼가 일찍이 주장했던 사내기업가(intra-corporate entrepreneur 또는 이를 줄인 intrapreneur)는 미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조직 내에서 어떤 형태로든 아이디어를 혁신으로 바꿀 수 있는 꿈꾸는 사람(dreamer)은 한국에도 많다. 기업 안에 있는 ‘intrapreneur’가 기회를 포착해 기업 밖으로 나가면 ‘entrepreneur’이 된다. 대기업 출신의 벤처 창업은 대기업 안에 사내기업가가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성전자 C랩을 통해 창업에 나서는 5개 과제 참여 임직원들. 사진=연합뉴스

삼성전자 C랩을 통해 창업에 나서는 5개 과제 참여 임직원들. 사진=연합뉴스

국내에서도 대기업 사내벤처 플랫폼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도입한 C랩, 삼성SDS의 씨드랩, 현대자동차의 벤처플라자, LG전자의 아이디어발전소, LGCNS의 사내벤처경진대회, 카카오 아이디어 공모전 등이다.

대기업이 사내벤처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는 이유가 있다. 큰 조직이 혁신에 유리한지, 작은 조직이 혁신에 유리한지 같은 논쟁은 더 이상 눈길을 끌지 못한다. ‘양손잡이 조직(ambidextrous organization·기존사업는 오른손 조직, 신사업은 왼손 조직)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직혁신의 새로운 방향타가 되고 있다. 기존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활용(exploitation)’과 신사업을 개척하는 ‘탐색(exploration)’,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전략이다. 코로나19로 한편으로는 구조조정, 다른 한편으로는 신사업 발굴의 과제를 안은 대기업으로서는 승부수를 던져야 할 절박한 상황이다.

◇ 왜 기업집단·CVC 규제를 풀어야 하는가?

대기업 사내벤처가 활성화되려면 스핀아웃(spin-out, 분사) 또는 스핀오프(spin-off, 독립) 등을 통해 기업 밖으로 쪽쭉 뻗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확장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대기업과 벤처간 선순환이 일어나면서 거대한 벤처 클러스터가 형성되는 미국과 그렇지 않은 한국의 차이는 여기서도 발생한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국내 대기업 내부의 관료적인 기업 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희망적인 것은 거대한 변화에 대기업이 위기를 느끼면서 기업 문화도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업 문화가 바뀌어도 법·제도상의 제약이 여전히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해 기업결합을 제한하는 공정거래법이 그것이다. 대기업에서 분사·독립하면 창업기업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계열사로 지정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내벤처 활성화와 위장 분사창업 방지 사이에서 출구를 찾아야 할 상황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미국처럼 기업주도 벤처캐피털(Corporate Venture Capital), CVC)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영역 붕괴, 파괴적 혁신에 대응하기 위한 대기업의 구조조정과 신사업 니즈는 CVC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글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업일수록 특히 그렇다. 사내벤처는 물론 사외벤처에 투자하는 CVC는 VC에 비해 성과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벤처와 대기업의 결합은 대기업 뿐 아니라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엑시트(회수)를 희망하는 벤처도 바라는 바다. 그러나 지주회사 형태의 대기업은 CVC를 보유할 수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공정거래법, 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등에서 규정하고 있는 금산분리 때문이다. 지주회사의 금융 자회사 보유 규제는 산업과 금융의 융합은 물론 M&A 시장을 제한해 결국 벤처창업과 회수까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지주회사의 CVC 보유 제한, CVC의 출자 제한 등을 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 대기업, ‘규제적 대상’에서 ‘전략적 활용’으로

기업환경이 열악한데 처음부터 청년들을 창업하라며 사지로 내던지듯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청년들이 대기업을 선호하는 것을 탓할 수도 없다. 현실을 인정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슬기가 요구된다. 벤처는 대기업과 결합할 수 있게 하고, 대기업 인재들은 사내창업을 통해 intrapreneur로, 또 기업 밖으로 나가 entrepreneur로 벤처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게 벤처와 대기업의 선순환이다.

실리콘밸리를 언제까지 부러워할 수만은 없다. 정부와 국회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말만 할 게 아니라, 기업들이 대응을 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 최소한의 규제와 악용시 사후 징벌적 배상제를 교환해서라도 대규모 기업집단 규제, CVC 규제를 확 풀 때도 됐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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