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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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재난지원금(코로나 지원금)을 고소득자까지 확대할 수 없다”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버티기’가 계속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지난 16일 코로나 지원금 사업이 담긴 '2020년도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발표하면서 “소득 하위 70%의 지원 기준을 지키겠다”고 강조했고, 이후 “전국민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압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최근엔 기재부 직원들에게 “결사의 의지로 지원금 증액을 막자”고 당부했다고 한다.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았던 홍 부총리의 평소 성향을 생각하면 의외라는 반응이 나온다. 그간 홍 부총리는 청와대나 여당의 주문에 순응하거나 끌려가는 경우가 많아 ‘예스맨’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무엇이 홍 부총리를 ‘소신맨’으로 만든 것일까.

◆경제 위기 닥치자 ‘예산통 DNA’ 살아나

홍 부총리는 공직 생활 대부분을 기재부 예산실에서 근무한 ‘예산통’이다. 예산통은 나랏돈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강하다. 그럼에도 그동안엔 현 정권의 ‘재정 지출 확대’ 기조를 충실히 이행해 왔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제 위기가 가시화되자 ‘예산통 유전자(DNA)’가 본색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재부 예산실 공무원의 전언이다. “올해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41.2%에 이를 전망이다. 2018년 35.9%였던 것을 생각하면 ‘역대급’으로 뛴 것이다. 국제신용평가사에서 국가채무비율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경고도 나왔다. 그런데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전망처럼 올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추락하면 채무비율은 42%, 43%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랏돈을 정말 필요한 곳에 아껴서 써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진 것 같다.”

코로나 지원금 외에도 나랏돈을 더 써야 할 곳이 많다는 점도 홍 부총리의 고민을 키우는 요소다. 기재부의 또다른 관계자는 “정부 내에선 3차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며 “실업 급증세를 막기 위한 고용 대책, 수출·내수 동반 추락으로 경영난에 빠진 기업을 돕기 위한 산업 대책 등에 수조원의 예산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은 고소득자에 코로나 지원금을 주자며 3조~4조원 예산을 증액하자고 하는데 그 돈이면 지원이 절실한 근로자와 기업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소비 진작 효과도 불투명한 고소득자 지원에 세금을 쓰느라 코로나 피해자들에게 쓸 예산이 부족해지면 안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사실 기재부는 코로나 지원금과 같은 현금성 지원 제도 도입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당초엔 사회보험료 경감·면제 지원으로 이를 대체하려 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으로 경제 활동이 제한된 상황에서 “나가서 돈을 쓰라”고 현금을 쥐어주는 것보다, 경제가 어려운 속에서도 매달 꼬박꼬박 내야 하는 지출 부담을 줄여주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당이 코로나 지원금 도입을 강하게 주장하자 “소득 하위 50%에 한정해 도입하자”는 식으로 물러섰고 이후엔 70%선까지 양보했다. 이런 마당에 고소득자까지 지급으로 확대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홍 부총리뿐 아니라 기재부 전반의 분위기다.

◆청와대의 모호한 태도도 한몫

청와대의 모호한 태도가 홍 부총리의 버티기에 한몫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청와대는 코로나 지원금을 소득 하위 70%까지 주느냐 100%까지 주느냐에 대해 명확한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여야가 합의해서 단일안을 만들어 오면 이를 존중하겠다는 입장 정도만 밝혔다. 정부 관계자는 “만약 청와대가 100% 지급을 주장하면 임명권자의 지시를 홍 부총리가 거부할 수 있겠냐”며 “청와대도 지원금 지원 범위에 대해 확신을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이것이 홍 부총리가 강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홍 부총리에 대한 청와대의 신뢰가 유지되고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앞으로 정부의 비상경제 대응은 경제부총리가 중심이 된 경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던 ‘비상경제회의’를 홍 부총리에게 맡긴 셈이다.

◆임기 끝 직감하고 마음을 비웠다?

홍 부총리는 2018년 12월 취임했다. 역대 경제부총리의 임기가 평균 1년 2개월 정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교체 시기가 됐다. 실제 관가에선 5월초 부총리를 포함한 주요 부처 개각설이 흘러나온다. 홍 부총리도 임기가 끝난다는 것을 직감하고 예전보다 자기 목소리를 키우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올 초부터 자기 소신을 주장하는 경우가 확실히 늘긴 했다”고 전했다. 홍 부총리는 작년 하반기 확정된 민간 택지 분양가 상한제 도입도 자신의 소신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국토부와 정치권에서 밀어붙이자 뜻을 굽혔다. 하지만 코로나 지원금 확대는 임기도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자신이 끝까지 막아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 부총리를 잘 아는 주위 관료들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홍 부총리의 말도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한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홍 부총리는 박근혜 정부 때 미래창조과학부 1차관을 지냈기 때문에 현 정부 들어 국무조정실장에 부총리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고 감사한 일이라고 자주 얘기한다”며 “자리를 지키려고 혹은 다음 자리를 도모하려고 계산적으로 움직일 사람은 아니다”라고 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