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배신의 민족' 된 배민…사장님들 뿔난 진짜 이유
‘장터’라는 잡지가 있었다. 일종의 동네 광고책이었다. 과일 가게, 음식점, 쌀집, 문구점, 관공서 전화번호까지 빼곡히 적혀 있어 1990년대 집집마다 하나씩은 다 있었다. 이런 동네 정보 잡지에서 가장 많이 펼쳐보는 페이지는 ㅍ치킨집과 ㄷ피자집, ㅎ중국집 등이었다.

전단지와 장터 같은 광고 수단은 거의 사라졌다. 이젠 스마트폰이 있고, 스마트폰엔 배달의민족이 있다. (물론 요기요도, 배달통도, 쿠팡이츠도 있다.) 앱들은 내 위치에서 가까운 곳의 카페부터 빵집, 횟집, 레스토랑까지 다 찾아 보여준다. 2010년부터 차곡차곡 점포 수를 늘려 최소 전국 14만개 가게가 앱에 들어있다. 3000억 정도이던 음식 배달시장은 이제 5조원으로 커졌다. 사실상 배민이 만들어낸 시장이다.

배민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 요즘 ‘수수료 꼼수 인상 논란’에 휘말렸다. 새롭게 개편한 요금 시스템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동네 사장님들의 원성을 샀다.

배민은 지난 1일 음식 주문액의 5.8%를 수수료로 내는 새로운 요금제(정율제)를 시작했다. 그동안은 월 8만8000원(광고 1건을 사는 데 드는 비용=일종의 입점료)을 내면 됐다. 정액제다. 입점료를 더 내면 점포 광고를 더 상단에 노출시킬 수 있었다. 광고비를 더 지출하는 업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였다. 일명 상단 '깃발꽂기'다.

새 요금제에선 광고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매출의 일정률만 내면 된다. 광고판 상단에 업체명이 노출되는 것은 무작위다. 우아한형제들은 "광고비가 모자란 영세 자영업자에게 더 공정한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새 수수료 시스템에서 사장님들의 반응은 대부분 이랬다.

"너네도 (다른 앱들하고) 똑같다. 이럴 줄 알았다."

궁금했다. 배민은 다른 앱하고 뭐가 그리 달랐을까. 배민은 10년의 신뢰를 깨고 정말 사장님들을 배신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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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최저 수수료에도 욕 먹는 진짜 이유

배민은 2010년 등장했다. 스마트폰 안에 길거리 전단지가 들어가 있는 걸 보고 "별 것도 아니네"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그런 배민을 '별 것'으로 만든 건 배민의 남다른 철학이었다.

배민 수수료는 업계 최저다. 10년 동안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현재 요기요 수수료는 12.5%다. 배민은 5.8% 수수료에 카드 결제 수수료 3% 내외를 합치면 약 8.8%가 된다.

배달 기사 인건비까지 포함된 '풀서비스'를 비교해도 배민이 낮다. 쿠팡이츠의 건당 수수료는 약 20%다. 우버이츠는 과거 25%의 수수료를 뗐다. 배민도 배달기사 인건비까지 포함시킨 '배민라이더스'가 있는데 이 수수료는 현재 16.5%다. 점주는 요리만 하면 아무것도 신경쓸 게 없기 때문에 고급 레스토랑 등이 많이 쓴다.

배민에는 또 다른 앱엔 없는 '전화주문'이라는 게 있다. 주변 음식점을 검색한 뒤에 배민을 통해 주문해도 되고, 전화번호로 직접 주문할 수도 있게 해놨다. 전화 연결을 하면 점주가 배민에 내는 수수료는 0%다. 배민을 통해 음식점을 알게 됐어도,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주문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배달의민족이 한강 시민공원에서 개최한 문화 행사 'ㅋㅋ페스티벌'.
배달의민족이 한강 시민공원에서 개최한 문화 행사 'ㅋㅋ페스티벌'.
○5년 전 '수수료 제로' 선언이 독 됐다

배달 앱의 수수료 논란은 묵은 이슈다. 과거에도 논란이 있었다. 5년 전 이야기다.

그때는 배민도 메뉴 하나 팔릴 때마다 일정 수수료를 받는 수수료 체계였다. 정률제 수수료로 8~9%를 받았다. 2위인 요기요가 배민의 2배 넘는 20%의 수수료로 '자영업자 피를 말린다'는 논란에 휩싸이자 배민은 전략적으로 더 '사장님 편'에 가까이 섰다. 우아한형제들은 당시 "우리는 수수료 제로를 선언한다"며 "대신 광고 1개당 월 8만8000원의 고정비만 받겠다"고 했다.

배민이 수수료를 폐지하자 요기요도 수수료를 12.5%로 낮췄다. 수수료를 높이는 대신 음식 브랜드 본사 등과 함께 10% 할인, 20% 할인 쿠폰 등을 쏟아냈다. 할인에 민감한 앱 사용자들은 요기요와 배민을 묘하게 왔다갔다 했지만 장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배민 편이었다.

사장님들은 말했다. "그래도 우리민족이지. 믿을 건 배민이다."

누구나 능력껏 광고비로 최소 8만8000원만 내면 매출과 상관없이 입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배민의 평판은 압도적으로 좋아졌다. 앱 사용자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났다. '요기요보단 배민으로 주문해야 사장님들한테 더 좋다'는 소문이 돌았다. 거대한 자본력으로 광고비를 월 수 천 만원씩 쏟아부어 특정 업체만 늘 상단에 노출되는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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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장사의 '룰'을 바꾼 배민

배민 이전엔 음식 장사의 성공 공식이 뻔했다. 역세권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 목 좋은 1층에 비싼 권리금을 내고 상가를 임차해 간판에도 수 천 만원을 들여야 했다. 손님을 모으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화려한 전단지를 뽑아 길 가는 사람은 물론 집집마다 뛰어다니며 붙여도 올까말까. 2층과 3층 상가에 들어가는 건 '망하는 길'로 여겨졌다.

배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줬다. 실제 구석진 골목 안 식당도, 3층과 4층에 자리한 작은 분식집도 배달로 대박을 낼 수 있는 기반이 생겼다. 음식만 맛있으면 배달로 얼마든지 승부해볼 수 있다는 희망의 플랫폼이 됐다. 만약 배민이 없었다면 늘 먹던 브랜드, 잘 알려진 식당만 계속 돈을 버는 구조가 됐을 터. 사람들은 배민 앱 안에서 우리 동네 새로 문 연 식당의 메뉴와 리뷰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됐다.

배민을 만든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는 힘들게 장사하던 어머니 밑에 자랐다. 식당 운영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배민은 창업 사관학교인 '배민 아카데미'를 수년 째 운영하고 있다. 장사 고수들이 장사 새내기에게 성공법을 알려주고, 상권 분석에서 마케팅 방법까지 전문가들이 코칭하는 귀한 수업들이다. 모두 무료다. 작년에만 9000명이 수강했다.

현금이 당장 급한 영세 상인을 위해 정부도 못한 일을 했다. 카드대금 지급결제일이 주 1회씩 이뤄지는데, 배민은 은행과 협의해 입점 점주에 한 해 매일 매일 현금이 들어올 수 있게 바꿨다. 사장님들의 건강을 생각해 주요 의료기관과 협약을 맺고 건강검진 할인해주는 서비스도 만들어놨다. 이 밖에 급구 알바 구인 서비스, 해충방제 할인, 비상금 대출, 여행상품 특가 할인, 소상공인 대출, 간편실손화재보험, 생활가전 구매 할인 등 다양한 제휴혜택을 만들었다.

수수료는 낮지, 사장님들을 위한 무료 교육과 각종 복지 혜택은 쏟아지지. 배민의 팬덤은 강렬했다. 그 강렬했던 팬덤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작년 12월. 요기요를 운영하던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가 매출 5000억원의 배민을 약 4조7500억원에 사들였다고 할 때부터다.
배달의민족이 지난해 개최한 '제 1회 배민 떡볶이 마스터즈' 행사.
배달의민족이 지난해 개최한 '제 1회 배민 떡볶이 마스터즈' 행사.
○배민의 실수

배민이 정률제 수수료 시스템 도입 시점을 발표한 건 작년 12월. 기업인수합병(M&A) 발표 시점과 겹친다. 그때 사장님들이 조용했던 건 "그래도 배민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두고 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배민은 자만했다. 10년간 쌓은 강력한 팬덤이 어떻게 화살이 돼 돌아올 지 몰랐던 걸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4월 1일. 뚜껑을 열자마자 자영업자의 민심은 폭발했다. 안그래도 외식 경기가 최악으로 치닫은 때. 마침 총선을 코앞에 둔 정치권의 먹잇감이 됐다. 각 지역자치단체마다 '공공 배달앱'을 만들겠다는 웃지 못할 발표들이 이어졌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해명해도 '독과점 기업의 횡포'와 '외국계 자본의 배불리기 꼼수'라는 꼬리표를 떼기는 어려워졌다. 대표가 급히 사과를 하고 수수료 체계를 손보겠다고 수습했지만 앞날은 불투명해졌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결합심사에서 '괘씸죄'를 면하지 못하게 된 게 가장 큰 문제다. 김재신 공정위 사무처장은 7일 "배민과 요기요 심사서 개편 수수료와 정보 독점을 집중 조사해 시장지배력에 대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며 강도 높은 조사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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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서는 '배민의 실수'가 지난해 실적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우아한형제들의 매출은 5654억원으로 1년새 80% 늘었다. 하지만 364억원의 적자를 냈다. 2016년 첫 흑자 전환한 지 4년 만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