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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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국가의 상징이다. 국가의 으뜸 상징으로 국기가 있고, 국가(國歌)도 있다. 나라 안팎에서 좋은 일과 궂은 일, 큰 행사가 있을 때 국기를 앞세우고 국가를 부른다. 태극기를 흔들어야 할 때 근원도 불분명한 한반도기를 들고 나오면 많은 사람이 문제제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유구한 역사와 피로 쌓아올린 전통, 무엇보다 다수 성원의 오랜 공감대 같은 것이 쌓인 것이 국기의 권위와 상징성이다.

미국인들이 통상 주요 행사에서 자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부르면서 전문 가수나 성악가를 내세우는 것도 이색적이다. 재미있는 해석으로 자국 국가 가사를 끝까지 다 알고 부를 수 있는 미국인이 많지 않아 그런 관행이 생겼다는 것도 있다. 멜로디가 서정적인 미국 국가는 사실 국가로서는 부르기도 그다지 쉽지는 않아 보인다. 국가는 흥얼흥얼 따라 부를 지라도 미국인들의 애국심은 대단하다. 설사 급여 받는 모병제 일지라도 군대에 적극 자원입대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국기와 국가(國歌) 다음의 국가 상징은 무엇일까. 돈이다. 국기와 국가가 명분과 대의, 격식과 의식에서 상징이라면 현실에서는 돈이다. 먹고 살고 생활하면서 행복한 삶을 추구해가는 ‘일상의 기준’이 화폐다. 지폐와 동전이라는 실물 화폐가 설사 밀려나도 마찬가지다. 돈은 경제 활동의 기준이며, 모든 평가와 보상의 계량 척도다. 세금도 돈을 베이스로 하는 것이니, 자유 개인과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 활동의 기본도 돈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국가의 주권과 상징, 종합 성과로서의 화폐

그래서 화폐는 나라마다의 주권이다. 대철학자 칸트도 국가의 어떤 제도보다 ‘화폐 시스템’의 신뢰가 크다는 점을 역설했다. 누구도 쉬운 위조로 화폐의 가치를 강탈할 수 없도록 정교하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상징성과 정체성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한 나라의 가장 보편적 상징적 도안과 문양이 들어가고, 가장 존경하고 본받을 만한, 혹은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그려진다. 미국 달러에 오른 건국 과정의 지도자들이 그렇고, 오늘날 일본의 기틀을 만든 개화기 사상가 실천가들을 담은 엔화가 그렇다. 중국도 현대 사회주의 국가를 주도한 인물을 화폐에 담았다. 많은 나라가 건국의 유공자를 그렇게 기리면서 국가통합을 꾀하고 대외적으로도 상징물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중세 인물’들만 그려 넣은 우리 돈 원화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한국이 아직 통합된 공동체로 나아가기까지는 멀고 험한 길이 남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가치와 영향력, 한 마디로 진정한 힘으로 보면 어떤 돈이 진짜 돈 같을까. 화폐는 국가의 상징이면서 국가의 실력과 역량, 총체적 파워의 종합 성적 구실도 한다. 달러, 원과 엔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를 생각해 보라. 위기 때 각 나라의 형편과 실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위기 때 더 한 달러 패권, 위안은 20분의 1미만

‘코로나 쇼크’는 이번에 분명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돈의 국제서열이 다시 한 번 명확해진 것이다. 올림픽 메달 순서만큼이나 확실하다. 미국 달러의 ‘1극 지존’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무제한으로 돈을 풀겠다”(무제한 양적완화)라고 해도 아랑곳 않는 분위기다. 한국은행이 이런 방침을 밝혔다가는 자칫 그나마 유지해온 원화 가치를 흔들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 달러는 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거의 100년가량 기축통화로 자리잡아온 미국의 힘, 달러의 패권은 그만큼 무섭다.

통상 경제위기라고 하면 미국 달러, 미국 국채, 금 정도가 ‘안전자산 트리오’로 분류됐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문제가 생긴 이번 코로나 쇼크에서는 단연 현금 달러만이 안전 자산으로 부각됐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상황 진단도 미래예측도 어려운, 공황 같은 이번의 위기 상황에서 기댈 곳은 미국 달러뿐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산업+금융+안보+외교력 등을 다 합친 미국의 저력이라고 할 것인가.

각국이 국가의 안전둑처럼 삼는 경제 방파제가 외환보유액이다. 이것을 보면 왜 달러가 강한지 재확인된다. 세계 각국의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은 61.94%(2018년 3분기 기준, IMF통계)에 달한다. 2015년 초 66%에서 조금 줄어든 게 이 정도다. 이번 위기를 거치며 이 비중은 다시 올라갈지 모른다. EU(유럽연합)가 단순히 경제를 넘어 하나의 생활공동체로 성장했지만 유로화 비중은 20.48%에 그친다. 그나마도 독일의 경제력이 있어 이 정도 됐을 것이다. 1999년 유럽 단일 화폐로 출발했지만, 20년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비교하기 어렵다.

통화로만 보면 중국은 비교 선상에도 못 오른다. 중국 위안화는 1.8%에 그친다. 미국과 중국을 비교하며 ‘G2’라고 부르는 게 실상 얼마나 ‘무리’인지 알 수 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고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두고 통상전쟁, 기술전쟁, 화폐전쟁 등등 온갖 표현이 나오지만 외환보유액 통계로는 20분의1도 안 되는 수준이다. 코로나 쇼크 이후 중국돈 위안화의 국제통화로서의 가치나 위상은 지금의 수준보다도 과연 더 올라갈 수 있을까.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에 국가적 명운을 걸고,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설립을 주도하며 유럽·아프리카까지 경제적 패권을 넓혀가려고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는 얘기다. 달리는 위안의 국제위상을 높이며 자국 화폐를 기축통화로 끌어올리기 위한 중국의 노력은 그만큼 치열하다는 얘기도 된다.

일본 엔화도 중국보다는 순서가 앞선다. 같은 IMF 통계로 보면 4.98%다. 아베노믹스의 성과에 따라 각국이 외환보유액에서 엔화비중을 늘린 결과 16년 만에 가장 높아진 것이다.

◆달러 편에 설 것인가, 위안화 주변 맴돌 것인가

‘퍼펙트 스톰’이라는 이번 복합위기에서 미국 달러화의 위상과 가치가 재확인 됐다. 위험의 파고가 높아지고 시계(視界)가 깜깜해질수록 믿을 것을 달러 밖에 없다는 인식이 퍼져있다. 현금의 다른 이름인 금값보다 더 높은 신뢰였다. 이번 위기에서 연일 요동을 친 한국의 자본·금융시장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한 것도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이었다. 제한적 범위였지만 영향력은 컸다. 달러 라인이 아니라 위안 쪽에 줄을 섰어도 시장을 그만큼 안정시켰을 수 있을까. 아직은 엄연한 현실이다. 달러의 힘은 당분간 더 지속될 것이다. 한국의 경우 금융시장의 안정화를 넘어 경제위기의 최고, 최후 안전판은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될 수도 있다. 이번에 체결한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는 6백억달러로 규모가 한정돼 있다.

물론 미국과의 통화스와프가 만능의 약은 아니다. 한국이 산업과 금융의 경쟁력을 높이고, 단호한 구조조정으로 생산성을 향상해야 하는 과제는 별개의 문제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외환위기, 금융위기를 막는 데 도움 될 뿐 우리 경제 내부의 진정한 위기 극복은 다른 차원이다.

돈의 국제 서열을 확인하면서 몇 가지 과제를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보다 미국 달러만 칭송할 게 아니라, 우리 돈은 언제쯤이나 저 대열에 속할 것인가다. 근본적인 숙제다, 원화는 몇 위나 될 것인가. 세계 경쟁에서 등위라고 할 만큼 수준은 될까. 위기 때면 먼저 팔아치우는 ‘위험 자산’은 아닐까. 또 하나의 과제는 한국이 기대고 때로는 의존할 곳은 어디인가다. 특히 위기 때 우선 협력 파트너는 어디인가. 가치와 철학의 동반자, 피로 맺은 동맹이라는 관점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현실적 힘의 관계로 봐도 냉철하게 볼 필요가 있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