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KIKO·외환 파생상품) 문제를 분쟁 조정 아젠다로 올려놓은 것이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55억 '키코 배상 권고'에 은행들 정면반발…체면 구긴 금감원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지난해 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가장 잘한 일’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은행 6곳(신한 우리 산업 하나 대구 한국씨티)에 키코 피해와 관련, 총 255억원을 배상 권고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배상 문제를 다시 점검하는 것이 금융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는 신념도 내비쳤다. 그는 이 자리에서 “금융의 신뢰를 다시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은행들에 당부했다.

그러나 은행들은 의견이 달랐다. 오히려 반기를 들었다. 감독 기관이 요구한다고 해서 주주 가치에 반하는 일을 강행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판단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안을 계기로 금감원이 업계 ‘팔 비틀기’ 식으로 해온 권고·제재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키코 권고 수용은 한 곳뿐

지난 5일 산업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은 금감원의 키코 분쟁 조정 결과를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권고를 받은 은행 중 공식적으로 불가 방침을 내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두 은행 모두 법무법인 자문을 토대로 내부 검토한 결과 이같이 결론냈다고 밝혔다. 이튿날 신한·하나·대구은행은 수락 시한 연장을 요청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나머지 은행들도 내부적으로는 배상이 어렵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말했다. 금감원 눈치를 보느라 ‘시한 연장’이라는 모호한 카드를 꺼냈을 뿐 속내는 똑같다는 얘기다.

권고대로 배상한 것은 우리은행 한 곳뿐이었다. 금융권 관계자는 “우리은행은 지난해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를 겪으면서 고객 신뢰 회복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던 상황”이라며 “키코 배상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판단해 대승적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감독기구 지시라도 법률이 우선”

금감원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수락하지 않아도 은행 책임은 없다. 그러나 감독기관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시각이 많다. 눈 밖에 나는 순간 종합 검사 대상이 되는 등 또다시 ‘도마’에 오를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상당수 은행이 키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은 배임 리스크까지 질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키코 사건의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품 설계 자체가 ‘사기’였는지 여부, 다른 하나는 판매 과정에서 ‘불완전판매’가 이뤄졌는지 여부다. 검찰과 법원은 모두 ‘상품에 사기성이나 불공정성이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2012년 기업이 은행들을 사기 혐의로 형사고발한 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피해 기업들이 낸 민사소송에서 불완전판매만 일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23개 기업은 손해액의 평균 26%(총 105억원)를 배상받았다.

사법적 판단이 끝난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2017년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가 키코를 ‘3대 금융적폐’의 하나로 규정하면서다. 이듬해 금감원은 법원 판결을 받지 않은 키코 피해기업을 대상으로 분쟁조정에 들어갔다. 법적 소멸시효(10년)가 끝난 뒤였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감원이 키코 배상 조정 착수를 가장 잘한 일로 뽑은 것은 코미디”라며 “무리한 제재 및 권고 관행을 뿌리 뽑는 것이 국내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