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의 천국’과 ‘5년의 지옥’을 경험한 회사가 있다. 남양유업이다.

1964년 ‘우리 아이들을 구호물자인 외국 분유만으로 키울 수 없다’며 국내 최초의 분유공장을 세운 남양유업은 이후 50년간 조제분유 시장의 1등을 지켰다.

2013년은 ‘추락의 해’였다. 대리점에서 주문하지 않은 제품을 본사가 강제 할당하는 ‘밀어내기’ 사건이 터졌다. 이듬해 발주 시스템 등을 전면 개편하고 새 출발을 공언했지만, 한번 찍힌 낙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뭘 해도 시장에선 믿어주지 않았다. 업계에선 “남양은 끝났다”고 했다.

멈춰섰던 남양의 시곗바늘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 2015년 대리점 ‘갑질’에 과징금 124억원을 부과했던 공정거래위원회는 작년 말 남양유업에 최고상인 ‘공정위원장상’을 줬다. 대리점과의 상생 노력에 대한 평가였다. 본사가 위기를 겪은 4~5년간 대리점주들은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됐다.
이광범 남양유업 대표가 지난 10일 서울 논현동 남양 본사 ‘1964빌딩’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이광범 남양유업 대표가 지난 10일 서울 논현동 남양 본사 ‘1964빌딩’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가짜 뉴스’ 대응 못해…집단 우울 위기

남양유업의 재도약을 책임지고 있는 이광범 대표(53)를 지난 10일 서울 논현동 본사에서 만났다. 남양유업 최고경영자가 언론과 한 첫 인터뷰다. 이 대표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입을 뗐다.

“갑질 사건이 터지고 그 다음해 모든 걸 바꿨습니다. 이젠 소비자들에게 우리의 진심을 알릴 때가 됐다고 판단했어요.”

이 대표는 27년간 남양의 물류·총무·영업 분야에서 일해온 ‘남양맨’이다. 2018년 말 대표가 된 그는 “5년 전부터 모든 직원이 우울증을 앓는 것 같았다”며 “당장 믿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더 정직하게, 더 진심으로 정면승부하자고 직원들을 독려했다”고 말했다.

가장 두려웠던 건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였다. 이 대표는 “컵 커피의 빨대 위치를 조정해 남양의 로고를 고의적으로 가렸다거나, 아이스크림 전문점 백미당에 남양 로고를 일부러 넣지 않았다는 등의 거짓 이야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더 큰 실책은 회사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침묵했던 것. 그는 “무지(無知)와 실기(失期)가 부른 참사인데 가짜뉴스를 고치지 않고 방치한 게 문제였다”고 덧붙였다.

"남양의 진심 6년…'든든한 우군' 된 대리점과 다시 뛰겠다"
‘1등 분유’ 기술력으로 재도약

남양유업의 실적은 ‘대리점 갑질사건’을 기점으로 부침을 겪었다. 2012년 637억원이던 영업이익은 2013년엔 적자(174억원)로 돌아섰다. 적자 폭은 2014년 260억원으로 더 커졌다.

추락했던 실적은 가공 초코우유인 ‘초코에몽’의 인기에 힘입어 한때 반등하기도 했다. 2015년과 2016년 각각 201억원과 418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그러나 이번엔 ‘남양이 제품에서 회사 로고를 잘 보이지 않게 조작했다’는 등의 가짜뉴스가 돌았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4월께 회사 경영과는 무관한 남양 창업주의 외손녀인 황모씨의 마약사건까지 터지면서 회사 이미지와 영업활동에 타격을 받았다. 남양의 영업이익은 2018년 86억원, 작년 3분기에는 6억9000만원으로 줄어들었다.

남양유업은 올해 실적 반등의 기회를 주력 제품인 분유와 기능성 제품 개발에서 찾는다. 남양을 유업계 1등으로 만든 건 분유다. 남양은 1970년대 단백질 성분 비율을 모유와 비슷하게 만든 ‘남양분유A’, 1980년대 칼슘 철분 등 영양 성분을 강화한 ‘점프’, 1990년대 두뇌 기능과 면역 강화 성분을 함유한 프리미엄 분유 ‘임페리얼’ 등으로 시장을 선도해왔다.

최근 분유 시장은 출산율 감소와 수입 분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 대표는 “분유는 남양의 창립 정신 그 자체”라며 “제품력을 극대화한 프리미엄 분유 제품으로 시장을 한번 더 흔들 것”이라고 밝혔다.

분유의 기술력은 고령화 시대엔 최고의 무기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고령화 심화에 따른 기능성 제품, 영양 보충식, 1인 가구 증가에 따른 간편식 등에 대한 연구에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상생 모범상’…자신감 회복

요즘 남양 대리점주들은 업계 최고 대우를 받고 있다. 본사 직원의 ‘갑질’이 끼어들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발주 시스템을 바꿔 대리점의 주문량보다 물량이 더 오면 자동으로 반송되고, 주문 내역과 받은 상품 내역이 일치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대리점주 자녀에게는 장학금(대학교 학비 50%)과 출산장려금 등을 지급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엔 이 대표가 전국 현장을 방문해 소통의 시간을 갖고 우수 대리점에 시상하는 행사를 열었다.

대리점주들은 서서히 본사의 진심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이 대표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 6년 전 대리점 갑질 문제로 증인 출석을 요구받자 대리점주들이 “차라리 나를 증인으로 불러 달라”며 동행했다. 일부는 의원실을 찾아가 “남양은 이제 그런 기업이 아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