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1950년 25세 나이에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했다. 부친인 구인회 LG 창업주가 별세하자 1970년 1월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1995년 경영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LG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앞줄 왼쪽 세 번째)이 2012년 4월 미수연(米壽宴·88세)에서 구본무 LG그룹 회장(앞줄 왼쪽 첫 번째·2018년 별세)과 구본준 LG그룹 고문(뒷줄 왼쪽 두 번째), 구광모 LG그룹 회장(세 번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네 번째)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하 떡을 자르고 있다.  /LG  제공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앞줄 왼쪽 세 번째)이 2012년 4월 미수연(米壽宴·88세)에서 구본무 LG그룹 회장(앞줄 왼쪽 첫 번째·2018년 별세)과 구본준 LG그룹 고문(뒷줄 왼쪽 두 번째), 구광모 LG그룹 회장(세 번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네 번째)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하 떡을 자르고 있다. /LG 제공
구 명예회장이 25년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다. 임직원도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는 물론 부품소재 분야로도 영역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기술 중시, 고객 중심, 계열사 자율경영 같은 오늘날 LG그룹의 경영 철학이 뿌리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 명예회장은 ‘고객’이라는 개념이 희미했던 1980~1990년대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라는 경영 철학을 제시했다. 자신의 경영혁신 사례를 담은 책 오직 이 길밖에 없다(1992년 발간)에서 스스로를 “고객에 미친 영감”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구 명예회장은 사내 문서의 결재란에 ‘고객결재’칸을 자신의 결재란 위에 뒀다.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신제품 개발 전에 고객평가단 의견을 들어 한 항목에서라도 ‘노(no)’를 받으면 제품 개발에 들어가지 않았다.

노사화합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지금은 LG그룹 내 노사갈등이 거의 없지만, 1980년대만 해도 달랐다. 1989년 LG전자 노조원들이 지게차를 몰고 붉은 깃발을 흔들며 창원대로(경남 창원)를 질주하는 모습이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을 비롯한 LG 경영진은 대립적인 노사 문화를 바꾸기 위해 ‘노사(勞使)’라는 말 대신 ‘노경(勞經)’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노조와의 소통에 나섰다. 이후 노사관계는 서서히 달라졌다. 회사가 에어컨 판매 부진에 시달리자 노조가 자발적으로 판매 운동을 벌였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하도록 했다. 이후 회장 재임 기간에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는 “연구소를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고 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를 통해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국내 민간 기업 중 처음으로 기업공개(IPO)를 통해 증시에 상장했다. 곧이어 전자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IPO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구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장남인 구본무 LG그룹 회장(2018년 별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정인설/고재연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