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선생 그만두고 공장에 와서 고생하게 했을 때, 니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제?"
1969년 12월 병상에 누워있던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장남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을 불러다 놓고 이렇게 말했다. 구 명예회장은 1950년 아버지의 부름으로 락희화학(현 LG화학)에 입사한 뒤 20년간 '공장밥'을 먹었다. 바로 본사 근무를 시작하는 다른 기업 2세들과는 달랐다.
구 창업주는 말했다. "그래서 니는 많은 것 안배웠나. 기업을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장'이다. 그래서 본사 근무 대신 공장일을 모두 맡긴 게다. 자신 있게 기업을 키워 나가라." 12월 마지막날 구 창업주가 세상을 떠났다. 1970년 '현장 전문가'인 구 명예회장이 LG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45년, 구 명예회장은 내수 기업이었던 LG그룹을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려놨다.
부산 연지동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 공장. (왼쪽부터)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LG 제공

부산 연지동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 공장. (왼쪽부터)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LG 제공

'호랑이 선생님'에서 기업가로
구 명예회장은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 '일꾼'이 될 어린이들에게 우리 역사와 글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지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겼다. 학생들에게 규율과 원칙을 강조해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렸다고 한다.
1950년 구 창업주는 그를 회사(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로 불러들였다. 락희화학이 국내 최초의 화장품 '동동구리무(럭키크림)'를 출시했을 때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며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버지의 부름 앞에 도리가 없었다.
구 명예회장은 '공장 지킴이'였다.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럭키크림을 만들었다. 하루 걸러 공장 숙직을 하며 새벽마다 도매상을 맞았다.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녔다. 공장 판자벽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바람과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군용 슬리핑백에 들어가 잠을 청하곤 했다.
주변 사람들이 부친인 구 창업주에게 "장남에게 너무한 게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구 창업주는 "대장간에서는 호미 한 자루도 담금질로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과 같다"며 혹독하게 가르쳤다. 구 명예회장이 20년간 쌓은 현장 감각은 그가 LG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이 됐다.
구 명예회장(가운데)이 럭키(현 LG화학) 청주공장에서 생산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LG 제공

구 명예회장(가운데)이 럭키(현 LG화학) 청주공장에서 생산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LG 제공

LG웨이의 근간을 만들다
구 명예회장은 1970년부터 25년간 그룹을 이끌었다. 그는 'LG웨이'의 핵심 경영 철학인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와 '인간 존중의 경영'을 선포하고 실천했다. 구 명예회장 취임 이후 회의는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시작됐다. 활자로 된 고객 의견이 아니라 진짜 목소리였다. 고객들의 불편 사항에 귀를 기울인 결과 금성사(현 LG전자)의 세계 최초 '한국형 물걸레 청소기', '인공지능 세탁기' 등이 탄생할 수 있었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 25주년을 맞아 적극적인 고객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서비스카에 시승해 환하게 웃고 있다. LG 제공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 25주년을 맞아 적극적인 고객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서비스카에 시승해 환하게 웃고 있다. LG 제공

"사람이 곧 사업"이라고 말하며 인재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것과 같은 애정이 바탕이 되어야 인재를 기를 수 있다"며 "내 경험에 의하면 사업을 맡길 만한 인재를 길러놓지 않고는 아무리 유망한 사업이더라도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완성된 작은 그릇보다 미완의 대기(大器)가 낫다"고 말하곤 했다.
총수의 권한을 전문경영인에게 넘겨 자율 경영 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다른 그룹들은 오너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제왕적 경영체제’를 공고히 하던 때다. 1980년대 후반 LG그룹의 노사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의 일이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님의 결단’을 요구하는 노조원들을 만나주지 않자 불만은 커져만 갔다. 그는 총수가 직접 노조와 담판을 지으면 자율 경영의 원칙이 무너진다고 판단했다. “사장들에게 전권을 넘겼다. 사장이 안 된다면 나도 안 되고, 사장이 된다고 하면 나도 된다.” 이때의 파업은 금성사가 삼성전자에 1위 자리를 내주는 결정적 계기였지만 구 명예회장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구자경 LG 명예회장(가운데)이 1990년 6월 금성사(LG전자) 고객서비스센터를 찾아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격려하고 있다. LG 제공

구자경 LG 명예회장(가운데)이 1990년 6월 금성사(LG전자) 고객서비스센터를 찾아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격려하고 있다. LG 제공

◆은퇴 후 '시골농부'의 길로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스스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뒤에는 충남 천안 연암대학교 농장에 머물며 버섯을 키우는 '시골 농부'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과거'에서 '미래'를 보는 경영자였다. 농·축산업에 한국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해 1974년 연암대학교(당시 연암축산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했다.
구 명예회장이 타계한 뒤에도 그룹 지배구조나 경영에는 큰 영향이 없다는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가 보유 중인 (주)LG 주식 164만주(지분율 0.96%)는 손자인 구광모 LG 회장에게 상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그동안 구 명예회장이 해왔던 LG가의 실질적인 좌장 역할은 구광모 회장의 친부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맡게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재연/김보형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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