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유동성 위기 딛고 '이랜드'가 돌아왔다
이랜드그룹엔 요즘 투자하겠다는 금융회사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이랜드가 전국에 보유한 땅 495만㎡(약 150만 평)의 개발에 대한 관심이다. 주력인 패션 부문 등에서 협업하자는 요청도 끊이지 않는다. 2015년 말 그룹 지주회사 이랜드월드의 신용등급 하락으로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때와는 딴판이다. 이랜드는 최근 3년여간 알짜 브랜드와 부동산 등을 대거 매각했다. 하지만 다른 브랜드들이 ‘화수분’처럼 성장해 매각한 브랜드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빚으로 사업 키우다가 신용등급 하락

이랜드는 빚으로 사업을 키우다 위기를 맞았다. 2003년 법정관리 중이던 뉴코아를 6300억원에 사들인 것을 시작으로 2013년 캐주얼 브랜드 케이스위스까지 50여 건의 인수합병(M&A)에 성공했다. 업계에선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다. 이를 통해 이랜드월드(패션), 이랜드리테일(유통), 이랜드파크(레저) 등을 축으로 연 매출 9조4000억원의 그룹으로 급성장했다. 인수 자금의 대부분은 차입으로 조달했다. 그 결과 2013년 그룹 부채비율은 399%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벌어들인 돈으로 금융 비용을 감당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중국 사업도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티니위니, 이랜드, 스코필드 등 40여 개 브랜드의 중국 매장 수는 2014년 8000개를 돌파했다.

무리한 확장에 따른 위기는 중국에서 시작됐다. 한국신용평가가 2015년 12월 중국 패션사업의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이랜드월드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0’로 하향 조정했다. 차입금을 조기 상환하라는 압박이 커지자 유동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4년 유동성 위기 딛고 '이랜드'가 돌아왔다
4년 유동성 위기 딛고 '이랜드'가 돌아왔다
“팔기 싫은 걸 빨리 팔았다”

이랜드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팔기 싫은 브랜드를 시장에 내놔야 팔린다”고 판단했다. 알짜 브랜드 매각을 결정했다. 2016년 3월 캐주얼 브랜드 티니위니(8700억원)를 시작으로 평촌 NC백화점(1380억원), 홈&리빙 사업인 모던하우스(7000억원), 엘칸토(405억원), 켄싱턴제주호텔(1280억원), 케이스위스(3030억원) 등을 줄줄이 매각했다. 2년4개월간 매각을 통해 마련한 돈은 2조1795억원에 달했다. 그룹 부채비율은 2017년 200%로, 2018년엔 172%로 떨어졌다. 올해 말엔 160%로 낮아질 전망이다.

M&A업계의 ‘큰손’이었던 이랜드는 구조조정에서도 ‘승부사’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타이밍은 적절한가 △밸류에이션(가격)엔 문제가 없는가 △우리의 미래가 사라지지 않는가 등 세 가지만 따져 신속히 움직였다. 그래서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다. 케이스위스는 지난해 약 5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는데도 불구하고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강조해 중국 기업에 매각하는 데 성공했다.

4년 유동성 위기 딛고 '이랜드'가 돌아왔다
핵심 브랜드·개발 기대되는 땅은 매각 안해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이랜드는 ‘미래’를 위한 핵심 자원은 그대로 남겼다. 브랜드와 영업력, 창의적인 젊은 인재 그리고 땅이다.

우선 브랜드가 건재하다. 매각한 브랜드의 공백을 메울 다른 브랜드들이 급성장하고 있다. 스파오(패션)와 애슐리(외식)는 올해 각각 3500억원, 2500억원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로이드(주얼리)와 슈펜 폴더(신발) 등은 성장성이 크다는 평가다. 수익성을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한 중국에서도 이랜드, 스코필드, 포인포, 프리치 등 4개 브랜드의 매출이 올해 66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랜드가 한국과 중국에서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뉴발란스의 매출은 8000억원에 육박하고 있다.

이랜드 관계자는 “핵심 사업부 매각으로 어려움을 겪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하나를 매각하더라도 계속 성장하는 다수의 브랜드를 보유한 게 이랜드의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개발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땅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랜드는 과거 인수한 기업 자산에 포함돼 있던 전국의 부지를 이번 구조조정 과정에서 전혀 매각하지 않았다.

4년 유동성 위기 딛고 '이랜드'가 돌아왔다
알바 출신이 스파오 본부장에…젊은 인재 약진

이랜드가 육성한 인재들이 위기 속에서 동요하지 않은 점도 미래의 힘이다.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해 사람의 강점과 보직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덕분이다. 강점을 중시하는 인사제도는 젊은 인재들의 과감한 발탁으로 이어졌다. 90여 개 스파오 매장을 총괄하는 이승관 본부장(37)은 이랜드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시작했다. 최운식 이랜드월드 패션부문 대표는 40세다.

위기를 겪으면서 폐쇄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던 조직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이전에 볼 수 없던 다른 기업과의 협업도 시작했다. 이랜드월드가 제3인터넷은행에 도전한 토스뱅크에 187억원을 투자해 소수지분(10%)을 확보한 게 대표적이다. ‘경영권을 가져올 수 없는 투자는 안 한다’는 원칙을 깬 첫 사례다.

2020년은 박성수 회장이 이화여대 앞에서 작은 옷가게로 창업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이랜드는 박 회장과 그룹의 오랜 숙원인 서울 마곡R&D센터와 제주 애월복합테마파크 개발을 시작한다. 이를 위해 사실상 창업 멤버인 김일규 부회장에게 이랜드건설 대표이사를 맡겼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