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대리기사·사찰 처사도 근로자"
배달대행 앱(응용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배달기사 등 ‘긱 이코노미(Gig Economy)’ 분야 노동자에 대해 ‘근로자’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이 최근 잇따르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지난 23일 배달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서울 이화여대 앞 사거리를 오가는 모습.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배달대행 앱(응용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배달기사 등 ‘긱 이코노미(Gig Economy)’ 분야 노동자에 대해 ‘근로자’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이 최근 잇따르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지난 23일 배달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서울 이화여대 앞 사거리를 오가는 모습.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9일 사찰에서 숙식하며 청소와 정리 등을 돕는 ‘처사’를 근로자라고 판결했다. 임금(월 100만원)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찰에 근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같은 법원은 2015년 처사들을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처사들이 자율 봉사를 했고 임금이 아니라 수고비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4년 만에 이를 뒤집은 것이다.

노동존중사회를 내세우는 문재인 정부 들어 그동안 인정하지 않던 ‘근로자성’ 판결이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비정규 프리랜서 근로 형태인 ‘긱 이코노미(Gig Economy)’ 노동시장이다. 긱 이코노미는 정보기술(IT) 플랫폼을 활용해 전통적인 고용계약이 아니라 원할 때 자유롭게 계약을 맺어 일하는 근로 형태를 말한다.

대리운전기사 택배기사 등에 대한 법원의 근로자성 판결이 잇따르면서 긱 이코노미 시장은 혼란에 빠지고 있다. 플랫폼 종사자들의 근로자성 판결은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져 긱 이코노미의 새로운 노사 갈등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권 사각지대에 있던 종사자들이 고용안전망에 진입하고 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사업주의 비용 부담을 가중시켜 플랫폼 기반의 신산업을 위축시키고 노동시장 경직성을 심화시킬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택배기사·라이더도 노조 만들어 파업 가능
더 경직되는 노동시장


디지털 플랫폼 기반의 ‘긱 이코노미(Gig Economy)’ 노동시장에서 근로자성 인정 판결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노동존중사회를 표방하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법원의 판단도 친노동 성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배달기사 대리기사 등 ‘비정규 프리랜서’ 근로형태인 플랫폼 노동 종사자가 크게 늘어난 영향도 있다. 플랫폼 노동 종사자는 현재 적게는 50만 명, 많게는 20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기존 제조업 기반의 노동법을 근거로 플랫폼 기반 종사자에 대한 근로자성 인정 판결이 잇따르면서 긱 이코노미 시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노동시장 경직성 심화 우려와 함께 새로운 노동형태에 맞는 법·제도 개편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봇물 터진 근로자 인정…'긱 이코노미' 대혼란

“지휘감독 여부·소득 의존도가 판단 기준”

최근 잇따르고 있는 법원 판결의 핵심은 ‘계약의 취지·명칭보다는 실제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해당 사업자를 통해서만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지 등이 근로자 여부를 가리는 법원의 주요 판단 근거라는 얘기다.

단초가 된 사건은 지난해 4월 대법원 판결이다. 대법원은 배달 중 사고로 사망한 배달대행 기사 A씨에 대해 1, 2심을 뒤집고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직) 종사자로 판단했다. 고정급이 아니라 배달 건당 수수료를 받고 상여금도 없었지만 A씨가 해당 배달대행업체로부터 소득의 절반을 얻었고 근무시간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며 전속성을 인정해 이 업체에 산재보험료 부과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두 달 뒤 대법원은 본사와 위탁계약을 맺고 일하는 학습지교사도 근로자로 판단했다. 업무 위탁 계약이었지만 학습지교사들이 회사로부터 업무처리 지침 등을 받는 등 지휘·감독을 받았고, 회사로부터 받은 수수료가 주된 소득원이었다는 점이 판결 근거였다. 근로자가 아니라는 1, 2심 판결을 뒤집은 결정이었다. 이 판결 이후 법원의 근로자성 인정 판결은 방송연기자, 수도검침원, 카마스터(자동차 판매용역)를 넘어 대리운전기사, 택배기사 등으로 이어졌다.

노조법상 근로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근로자는 임금, 근로시간, 연차수당 등의 근로조건을 보호받고 노조 결성, 단체협약 체결권이나 파업권도 가진다.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노조법)에 각각 규정돼 있는 근로자의 권리다. 근로기준법은 특정 사업주와 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종속적인 관계가 직접적으로 있는지를 주로 본다. 노조법은 같은 사용자와 종속관계라도 임금이 아니라 ‘업무’상 종속성이 인정되는지를 보는 경우가 많다. 노조법상 근로자의 범위가 더 넓다는 얘기다.

최근 근로자성 판결은 대부분 노조법상 근로자로 인정하는 판결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른 근로시간·연차수당 등의 권리는 없지만 노조를 결성하고 사용자와 협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종철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아직까지는 법원의 판결이 노조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수준이라 사업주도 계약해지 등의 방어수단이 있다”면서도 “향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이 늘게 되면 권리의무관계에 큰 변동이 생겨 혼란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 판결 쏟아지는데 손놓은 정부

근로자성 판결이 늘어나고 있지만 법원의 판단도 일관적이진 않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4월 청호나이스 정수기 수리기사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아니라고 했다가 두 달 뒤인 6월에는 코웨이 정수기 수리기사를 근로자로 판결했다.

정부도 다르지 않다. 지난 6일 고용노동부 서울북부지청은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 ‘요기요’ 배달원을 근로자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정부가 배달대행기사를 근로자로 처음 인정했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고용부는 “특이한 경우니 확대해석 말라”는 이례적인 설명자료를 냈다. 신산업 출현으로 시장은 급변하고 있는데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조법상 근로자라는 판결은 향후 산별노조로의 세력화 토대를 놓아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진짜 플랫폼 종사자(자영업자)와 실제 근로자에 가까운 취약 종사자를 구분하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백승현 기자/최종석 노동전문위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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