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대기업 A사의 중소기업 B사 기술 유용 혐의를 조사하던 박예슬 공정거래위원회 기술유용감시팀 사무관의 눈이 번쩍 뜨였다. 1년 넘게 풀지 못한 숙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PC 모니터에는 A사가 B사 기술을 토대로 자체 개발계획을 세운 정황이 담긴 이메일과 A사가 B사에 요청해 받은 제품 설계도면이 차례차례 올라왔다.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공정위는 최근 A사에 시정명령과 함께 3억원의 과징금을 매겼다.

정부 '디지털포렌식 조사' 확산…"정보 샐라" 기업들 벌벌 떤다
디지털 포렌식이란 ‘신무기’ 덕분에 그동안 혐의 입증이 어려워 포기해온 기술유용 사건을 해결할 길이 열린 것이다. PC·모바일 기기와 인터넷에 남아 있는 정보를 분석해 숨겨진 증거를 찾아내는 디지털 포렌식 기법이 정부 각 부처에 확산되고 있다. 검찰, 경찰뿐 아니라 공정위 환경부 고용노동부 금융감독원 등도 앞다퉈 관련 조직을 키우고 있다. ‘숨겨진 위법행위 적발’이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무분별한 정보수집으로 기업 부담을 키운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공정위는 2017년 11월 기술유용사건 전담팀을 신설한 뒤 지금까지 네 건을 적발해 제재했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기술유용 사건의 특성상 공정위에 디지털 포렌식 전담조직이 없었다면 해내기 힘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7년 한시조직으로 신설한 디지털조사분석과는 지난 9월 정규조직이 됐다. 공정위 각 부서가 하는 조사에 대부분 동원되기 때문에 과 단위 조직으로는 가장 많은 22명이 몸 담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디지털조사분석과가 설치된 뒤 공정위의 증거 수집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고 설명했다.

고용부는 기업들의 노동관계법 위반 조사 및 근로감독을 점검하는 데 포렌식 기법을 쓰고 있다. 올 상반기에만 디지털 포렌식 기법을 활용해 임금체불 부정수급 연장근무 위반 등 418건을 적발했다. 금융감독원이 최근 KEB하나은행이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 판매와 관련해 손해배상 검토 자료를 작성했다가 삭제한 사실을 찾아낸 것도 이 기법 덕분이었다.

디지털 포렌식이 확산되는 걸 바라보는 기업들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각 부처가 범죄 혐의와 무관한 정보까지 ‘싹쓸이’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서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정위 환경부 고용부 등 기업 규제·조사 담당 공무원이 대폭 늘어난 데 이어 삭제된 정보를 되살리는 수사기법까지 거머쥔 만큼 기업 조사 횟수도 늘고, 강도도 세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부처마다 조사 인력을 늘리고 첨단 수사기법을 도입한 데 대해 ‘탈탈 털면 안 걸릴 회사가 어디 있느냐’는 하소연이 늘고 있다”며 “경기도 나쁜 만큼 기업 경영에 너무 큰 부담이 되지 않도록 조사 횟수와 강도 등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