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분을 지도교수님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1985년 서울대 법학대학원, 한 대학원생의 당돌한 발언이 교수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참신한 이론을 배우고 싶다’며 민법 분야 최선임 교수 대신 젊은 교수를 찾아간 대학원생의 일화는 빠르게 학내에 퍼져나갔다. 소위 ‘찍히면’ 학위를 따기 어렵던 시절. 대학원 생활은 당연히 녹록지 않았다.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대신 은행 입사를 결정했다. 청년에겐 돌파구였다. 새로운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낯선 금융 분야였지만 끊임없이 공부했다. 30여 년이 흘러 은행은 간판을 두 번 바꿔 달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최근 연임에 성공한 허인 국민은행장 얘기다.

KB금융지주는 지난달 계열사 대표이사 후보추천위원회를 열어 허 행장을 차기 행장 단독 후보로 정했다. 취임 당시 ‘비주류’로 불리던 허 행장은 국민은행의 DNA에 ‘혁신’을 이식한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창사 이래 사상 최대 실적도 달성했다. 그의 연임에 큰 물음표가 나오지 않은 이유다.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업무에 관한 소신엔 양보 없어

허 행장이 입사한 장기신용은행은 직원 300명의 작은 은행이었다. 기회는 조직의 크기와 반비례했다. 본부 업무부(영업지원그룹)에 발령난 그에게는 첫해부터 무거운 임무가 주어졌다. 허 행장은 “다른 은행에 입사한 또래들과 달리 신입 직원 때부터 1년치 영업이나 내년 경영 목표를 세우는 업무를 맡았다”며 “작성한 초안이 실제 경영에 반영되는 것을 보면서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조직 분위기도 젊은 편이었다. ‘새내기’ 허 행장의 제안을 선배들은 편견 없이 받아줬다.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업무에 관한 소신엔 양보가 없었다. 속 시원히 털어놔야 직성이 풀렸다. 다른 은행은 어떤 업무를 하는지 일일이 조사했다. 새로운 제안도 끊임없이 내놨다. 노조위원장을 맡았을 때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조합원들에게 “복지 수준을 높이려 한 것이지 회사 미래의 발목을 잡으려 한 건 아니다”며 자진 사퇴하기도 했다. 선배들은 그에게 ‘장기신용은행의 돈키호테’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항의하는 고객 이야기 끝까지 들어줘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은행업계는 큰 변화를 맞았다. 장기신용은행은 국민은행에 합병됐고, 이후 주택은행과 또다시 합쳐지면서 현 조직을 갖추게 됐다. 허 행장은 국민은행에서 본부와 영업점을 두루 거쳤다. 서울 삼성서초타운(대기업), 청량리 기업금융 지점(중소기업), 신림 남부지점(개인 고객)을 이끌며 각 분야의 영업을 모두 경험했다. 지점장으로 일할 때 철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직원들이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것, 둘째는 상대하기 어려운 고객은 자신이 직접 만나는 것이었다.

2008년 서울 신림 남부지점에서 일할 때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영업점에서 판매한 펀드들이 대규모 손실을 봤다. 항의하는 고객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까다로운 고객을 윗사람에게 안내하는 게 금기시되던 때였다. 허 행장은 그들을 창구가 아니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고함을 치는 고객, 두 시간 동안 울기만 하는 고객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났어요. 해결이 안 돼도 무조건 끝까지 얘기를 들어줬죠. ‘영업’이란 무엇인지 가장 많이 배웠던 시기였습니다.”

허 행장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영업통’으로 거듭났다. 국민은행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기관 영업에서도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영업그룹 부행장에 오른 뒤 국민은행은 2016년 아주대병원, 2017년 서울적십자병원의 주거래은행으로 선정됐다. 2017년에는 다른 은행에서 5년간 운영하던 경찰 공무원 전용 ‘참수리대출’의 사업권을 따오기도 했다.

‘無채널 출신’의 반란

2017년 11월 허인 당시 영업담당 부행장은 행장에 선임됐다. ‘의외의 인사’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이른바 ‘채널’이 없는 장기신용은행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채널’(국민은행)과 ‘2채널’(주택은행) 출신이 아니면 자리를 넘보기 힘들 때였다. 은행권에서 1960년대생 수장이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허 행장은 취임하자마자 파격적인 경영 실험을 계속했다. 조직 문화부터 바꿨다. 은행권의 상징 같던 ‘유니폼’을 처음으로 폐지했다. 자유로운 문화에서 창의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는 신념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은행이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

회의 문화도 바꿨다. 허 행장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신입 행원과 대리급도 참석해 임원과 직접 얘기를 나눈다. 실무를 가장 잘 아는 직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장기신용은행에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돈키호테’가 나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겠다는 의도도 있다. 보고서를 기반으로 한 정기 보고 등 비효율적인 요식 행위는 최소화했다.

“디지털 서비스가 고객 삶 바꿀 수 있다”

디지털은 허 행장이 집중하는 경영화두 중 하나다. 그는 ‘사람 중심의 디지털 전환’을 꾸준히 강조한다. 단순히 기술만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고객에게 더 나은 경험을 주는 기술 기반을 만들자는 얘기다. 손바닥 출금(영업점에서 도장 없이 손바닥 정맥으로 인증해 출금하는 기술), 태블릿 모니터를 활용한 디지털 창구를 만든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달 들어서는 은행권 최초의 알뜰폰(MVNO) 브랜드 ‘리브M’을 출시하고 통신 고객 확보에도 나섰다. 허 행장 체제하에서 국민은행은 지난해 2조2592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순이익을 기록했다. 이달 이사회 절차가 끝나면 그는 내년 11월까지 국민은행을 계속 이끌게 된다. 최고경영자(CEO)로서 남은 임기 동안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에 ‘숫자’는 없었다. 키워드는 ‘일관성’이었다.

“많은 CEO가 임기 내에 꼭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근시안적인 행동을 합니다. 임기 중 목표보다는 다음 경영인이 오더라도 국민은행이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확실히 닦아 놓고 싶습니다.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라는 게 지금의 소신입니다.”

■ 허인 국민은행장 프로필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1980년 대구고 졸업
△1984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87년 서울대 법과대학원 졸업
△1988년 장기신용은행 입행
△2004년 국민은행 대기업팀장
△2005년 국민은행 동부기업금융지점장
△2015년 국민은행 경영기획그룹 전무 겸 최고재무책임자(CFO)
△2016년 국민은행 영업그룹 부행장
△2017년 11월~ 국민은행장


정소람/송영찬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