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벤처캐피털인 현대크래들을 설립해 미국 실리콘밸리 등의 벤처기업에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다. 현대크래들 직원들이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이 개발한 센서를 통해 운전 중 생체리듬을 측정하는 기술을 평가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제공
현대자동차는 벤처캐피털인 현대크래들을 설립해 미국 실리콘밸리 등의 벤처기업에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다. 현대크래들 직원들이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이 개발한 센서를 통해 운전 중 생체리듬을 측정하는 기술을 평가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제공
네이버는 미래에셋대우와 손잡고 지난해 5월 ‘중국의 우버’로 불리는 승차공유업체 디디추싱에 2800억원가량을 투자했다. 이어 8월에는 동남아시아의 우버로 통하는 승차공유업체 그랩에 1억5000만달러(약 1700억원)를 넣어 지분 1.5%를 확보했다. 네이버와 미래에셋대우는 50%씩 출자해 1조원 규모로 설립한 ‘아시아 스타트업 투자 펀드’를 통해 아시아 유망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발굴, 투자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해외 스타트업 투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 EY한영회계법인 조사에 따르면 국내 30대 그룹의 벤처 투자 규모는 2009년 2100만달러(약 250억원, 11건)에서 작년 8억7900만달러(약 1조500억원, 91건)로 40배(금액 기준)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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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경쟁력을 키우는 자본 수출

기업들은 상품 수출을 넘어 자본 수출의 주력부대 역할도 하고 있다.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등 투자 전문조직을 속속 강화하는 이유다. 4차 산업혁명 등 미래 사업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씨 뿌리기(지분 투자) 작업의 일환이다. EY한영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30대 기업 중 70%가 벤처 투자를 위해 CVC(50%)나 전담조직(20%)을 운영하고 있다. 17%는 ‘조직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특별한 계획이 없다’는 응답은 13%에 그쳤다.

현대자동차는 2017년 기존 현대벤처스를 확대 개편해 CVC인 현대크래들을 출범시켰다. 현대크래들은 서울을 비롯해 미국 실리콘밸리, 독일 베를린, 중국 베이징, 이스라엘 텔아비브 등 5개 거점을 운영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만 미국 자율주행업체 오로라(투자액 239억원), 이스라엘 음성인식업체 오디오버스트(56억원), 미국 로봇업체 리얼타임로보틱스(18억원) 등 여섯 곳에 779억원을 투자했다. 김창희 현대크래들 상무는 “기업들이 CVC 등을 통해 투자를 늘리는 것은 투자수익보다 기술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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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은 계열사들의 출자를 받아 지난해 5월 실리콘밸리에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계열사별 성장 전략에 맞는 투자처를 발굴하는 임무를 맡았다. 계열사 자금을 담은 4억2500만달러 규모 펀드도 조성했다. 이를 통해 통신업체 LG유플러스는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스타트업인 8i와 어메이즈VR 등에 투자했다. LG화학은 생화학 합성물질을 생산하는 라이고스에 베팅했다. 조계현 LG테크놀로지벤처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작년 10월부터 법인 설립을 위해 사람을 뽑았는데, 바로 그달에 자율주행 스타트업 라이드셀 투자를 진행했을 정도로 속도감 있게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2015년부터 미주법인에 벤처 투자조직을 꾸렸다. 올 6월에는 미국 팹리스 전력반도체회사 라이언반도체에 35억원을 넣어 지분 5.42%를 확보했다. 두산인프라코어와 한화그룹도 실리콘밸리 등지에서 투자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2016년 설립한 롯데액셀러레이터를 중심으로 해외 투자 활동을 하고 있다. 베트남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60만달러짜리 펀드를 조성해 10여 곳에 자금을 대기도 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최근 산업은행과 함께 627억원짜리 오픈이노베이션 펀드를 조성했다”며 “유통·물류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라고 했다.

금융사 가운데서는 미래에셋대우가 해외 벤처 투자를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다. 그랩과 디디추싱 외에도 중국 드론회사 DJI, ‘중국판 배달의민족’인 메이퇀뎬핑 등에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벤처 사냥

국내외 대기업 및 기관투자가들의 자금을 받아 해외 스타트업에 주로 투자하는 노틸러스벤처파트너스의 브라이언 강 대표는 “한국 20대 기업은 거의 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나와서 기술 동향을 파악하고 투자 기회를 찾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해외 투자조직을 운영하는 기업이 삼성, 현대차, LG 정도에 불과하던 3~4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경쟁사끼리 손을 잡고 벤처 투자에 나서는 사례도 있다. 현대차가 일본 도요타·혼다와 함께 AI업체 퍼셉티브에 공동 투자한 게 대표적이다. 김창희 상무는 “이제 모든 것을 한 회사나 한 국가 안에서 개발하겠다는 생각으로는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리콘밸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