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도 물가도 '1%대 수렁'에 빠졌다

경제 활력 잃어 가는 한국
경기 침체와 대외여건 악화 등의 영향으로 소비가 위축되면서 기대 인플레이션이 사상 처음으로 1%대로 내려앉았다. 서울 명동의 한 상가에 임차인을 구하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경기 침체와 대외여건 악화 등의 영향으로 소비가 위축되면서 기대 인플레이션이 사상 처음으로 1%대로 내려앉았다. 서울 명동의 한 상가에 임차인을 구하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소비자의 물가상승률 예상치를 의미하는 기대 인플레이션이 역대 처음으로 1%대로 내려갔다. 내년 경제성장률이 1%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분석도 속속 나오고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3~4%대를 오가던 기대 물가와 경제성장률이 동시에 1%대로 주저앉을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다. 저출산·고령화, 신산업 육성 지연 등 그동안 쌓인 구조적 문제에 미숙한 정책적 대응과 대외여건 악화 등의 요인이 겹치면서 한국 경제의 활력이 빠른 속도로 식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新 3低에 저출산까지…'침체터널'에 갇힌 경제, 탈출구가 안보인다

한국은행이 26일 발표한 ‘2019년 9월 소비자동향조사’를 보면 이달 기대 인플레이션은 전달에 비해 0.2%포인트 떨어진 1.8%로 집계됐다. 통계를 작성한 2002년 2월 후 최저치다. 기대 인플레이션은 앞으로 1년 동안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을 나타낸 지표다. 이 지표가 낮아지면 경제주체들은 향후 물가가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소비를 미루는 경향이 생긴다. 제때 대응하지 않으면 ‘물가 하락→기대 인플레이션 하락→소비·투자 위축→물가 하락’으로 이어지는 장기 불황에 빠질 우려도 있다.

저물가 우려가 확산되는 가운데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내년 경제성장률이 올해(한국은행 예상치 2.2%)보다 더 낮은 1%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이날 발표한 ‘2020년 국내외 경제전망’이라는 보고서에서 내년 성장률을 1.8%로 내다봤다. 앞서 모건스탠리는 내년 성장률을 1.7%, 국가미래연구원은 1.9%로 각각 제시했다.

문재인 정부 초대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낸 김광두 서강대 석좌교수는 “정책당국이 세계 경제 질서와 시장 생태계를 외면하다보니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경제가 만성적 침체에 직면한 상황에서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 쉽게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성장률 전망·기대인플레 1%대로…더 커진 '장기불황 공포'

新 3低에 저출산까지…'침체터널'에 갇힌 경제, 탈출구가 안보인다

‘표류하는 한국 경제, 이대로 가면 좌초한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서강대 석좌교수)은 26일 열린 한국경제연구원 특별좌담회에서 이 같은 제목의 발제문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 초대 국가경제자문위원회 부의장을 지낸 그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으며 외부 충격이 오면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LG경제연구원은 이날 보고서에서 “저성장·저물가·저금리 ‘3저(低) 위기’에 저출산까지 겹치면서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대 인플레이션이 1%대로 내려가면서 소비·투자는 한층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출생아 수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데다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면서 잠재성장률(한 나라의 자본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해 이룰 수 있는 성장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1%대 저성장이 고착화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자 학계와 전문가들은 “정부가 시장경제에 기반한 정책 대전환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치명적 저물가, 소비·투자 ‘발목’

LG경제연구원은 이날 보고서에서 한국의 성장률을 올해 2.0%, 내년 1.8%로 전망했다. 1%대 성장률 전망의 배경으로는 민간소비와 설비투자 부진을 꼽았다. 이 연구원은 소비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 기준)이 올해 2.0%, 내년 1.6%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2015~2018년 연평균 소비 증가율(2.6%)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올해 -8.7%, 내년 -0.1%로 전망했다. 이 같은 수치가 현실화하면 한국의 설비투자는 2018년부터 내년까지 3년 연속 뒷걸음질치게 된다.

김 원장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시장경제 중심으로 바꾸지 않으면 1%대 저성장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달에 기대 인플레이션이 역대 최저치(1.8%)로 떨어진 만큼 경기 침체의 골이 더 깊어질 것이란 시각도 있다. 물가가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되면 현금 가치가 부각되고 실질금리(명목금리-기대 인플레이션)는 오른다. 이러면 가계와 기업의 현금 보유성향이 강해지면서 소비·투자는 위축된다. 신인석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도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기대 인플레이션이 계속 하락세를 이어가면 경제주체들의 소비심리를 위축시킬 위험이 있다”며 디플레이션의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L자형’ 장기침체 진입 가능성

한국의 성장률 추이가 ‘U자형’이 아니라 ‘L자형’ 장기침체에 진입할 것이라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잠재성장률이 빠르게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16~2020년 2.5%에서 2021~2025년에는 2.1%, 2026~2030년에는 1%대 후반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잠재성장률 전망치가 하락한 원인으로 저출산·고령화가 꼽힌다. 통계청에 따르면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가임기간에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기 수)은 2015년 1.23명에서 지난해 0.98명으로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한 명 미만인 나라는 한국뿐이다. 생산가능인구(15~64세)도 2020~2030년 매년 20만~30만 명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LG경제연구원은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소비·투자 증가율이 하락할 것으로 봤다.

경제가 침체를 넘어 금융위기 등이 닥칠지 모른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기업가정신과 근로의욕이 동시에 약화되면서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며 “외국인 투자자가 자금을 뽑아갈 조짐도 나타나는 등 금융위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경제연구원 좌담회에서 “혁신과 포용의 시장경제로 경제정책을 전환해야 한다”며 “시장 원리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정책을 재설계해 경제·산업 혁신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익환/임도원 기자 lovepen@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