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국내 은행의 정기예금 계좌 수가 2000만 개에 육박하며 역대 최대 수준으로 불어났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당장 투자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정기 예·적금을 찾는 고객이 그만큼 늘었다는 얘기다. 경기 불확실성이 계속되면서 주식시장이 주춤한 데다 부동산 거래까지 위축된 데 따른 변화로 분석된다.
"불안할 땐 묻어놓자"…정기예금 계좌 역대 최대
금리 내려가도 계좌 수는 증가세

14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은행 정기예금 계좌 수는 1929만 개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전년 동기(1573만9000개)에 비해 22.6% 증가했다. 10년 전인 2008년(1004만8000개)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 수준이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계속 내려가는데도 계좌 수는 늘어나는 추세다.

정기예금 계좌 수가 1000만 개를 처음 넘긴 것은 금융위기가 있던 2008년 하반기다. 같은 해 상반기 894만9000개에서 6개월 만에 12.3% 증가했다. 이후 다시 900만 개 선을 유지하다 2011년부터 1000만 개 시대가 본격화됐다. 2016년까지는 별다른 차이 없이 1000만 개 초반대를 유지하다가 작년부터 증가세가 가팔라졌다.

매월 일정 금액을 부어야 하는 정기적금 계좌 수도 급증했다. 지난해 말 국내 은행 정기적금 계좌 수는 1248만5000개로 집계됐다. 2008년 말(375만5000개)과 비교하면 세 배 이상으로 늘었다.

“까먹지 말고 유지만 하자”

요즘 1년 만기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대부분 연 1.5~1.8%로 높지 않다. 지난달 기준금리가 인하되면서 연 2%를 넘는 정기예금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은행권에선 올해 말엔 정기예금 계좌 수가 2000만 개를 넘어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목돈이 생겼을 때 투자처를 찾거나 용도가 생기기 전까지 일단 넣어두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산관리 상담을 전문으로 맡는 은행 프라이빗뱅커(PB) 사이에선 “요즘처럼 경기가 불확실할 땐 돈을 까먹지 않고 유지만 해도 훌륭한 자산관리”라는 얘기가 나온다. 원금 보장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주가연계증권(ELS)도 대안으로 꼽히지만 수익률은 큰 차이가 없다.

송재원 신한PWM서초센터 팀장은 “투자보다 보관에 더 신경쓰는 고객이 많아졌다”며 “큰 수익률을 기대하기보다는 경기 흐름이 좋아질 때까지 일단 묻어두자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모바일 등 비대면 거래가 확산되면서 정기 예·적금 계좌를 개설하는 과정이 한층 쉬워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은행 정기 예·적금에 묻어놨다가 언제든 필요할 때 찾아 쓰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얘기다.

정기예금 계좌에 들어가는 금액은 대부분 1억원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 정기예금 계좌 1929만 개 중 97.7%인 1884만1000개가 1억원 이하 금액으로 분류됐다. 10억원을 초과하는 정기예금 계좌 수(4만 개)는 10년 전인 2008년 말(2만5000개)에 비해 60.0% 증가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금리에 대한 기대가 작은 만큼 해지에 따른 금리 손해 부담도 크지 않아 더욱 편하게 맡기는 분위기”라며 “정기 예·적금 선호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