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부총리
홍남기 부총리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100대 전략품목의 공급망을 1~5년 내 안정화하기로 했다. 국산화 및 적극적인 수입처 다변화를 통해서다. 이를 위해 7년간 7조8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이 같은 계획을 발표했다. 홍 부총리는 “100대 품목의 공급을 조기에 안정화하기 위해 예산과 금융, 세제, 규제특례 등 전방위적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며 “고순도 불화수소 등 20대 핵심 품목은 1년, 나머지 80대 품목은 5년 내 공급을 안정화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정부는 해외 소재·부품기업 인수합병(M&A)을 독려하기 위해 한국수출입은행 등을 통해 M&A 자금을 2조5000억원 이상 지원하기로 했다. 일본 수출규제에 따라 자금 부족을 호소하는 기업에는 대출 만기 연장과 함께 올 하반기에만 35조원의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방침이다.
정부 "100대 전략 품목 1~5년내 공급 안정화"
화관·화평法 규제는 '찔끔' 풀고…소재 R&D에 7.8兆 투입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가마우지에서 펠리컨으로 바꾸겠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 범부처 브리핑에서 이같이 말했다. 중국 어부들이 과거 가마우지의 목 아래를 끈으로 묶어 물고기를 잡아도 못 삼키게 한 뒤 가로챘던 낚싯법을 빗댄 것이다. 국내 기업이 수출을 늘릴수록 핵심 부품의 ‘목줄’을 쥐고 있는 일본 기업들의 매출만 키워줬던 게 아니냐는 반성이다. 먹이를 부리 주머니에 넣어와 새끼에게 먹이는 펠리컨처럼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차세대 핵심 수출품목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다.

정부는 업계 의견과 전문가 검토를 거쳐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기·전자, 기계·금속, 기초화학 등 6개 분야에서 단기(1년) 20개, 중장기(5년) 80개의 집중 육성대상 품목을 선정했다. 향후 7년간 총사업비 기준 7조8000억원의 예산을 집중 투입하는 한편 2조5000억원 이상의 인수금융과 35조원 규모의 유동성(올 하반기 기준)을 지원할 방침이다.

2차전지용 분리막과 파우치,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 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핵심 소재를 국산화하거나 대체 수입처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수출주도형 국가로서 핵심 소재 등의 공급망에 대해 원천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겠다는 의미다.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화평법),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등 기업 발목을 잡아온 것으로 평가되는 ‘규제 법안’의 적용도 한시 완화한다. 수출규제 대응물질 취급시설의 인허가 및 기존 사업장의 영업허가 변경신청 기간을 종전 75일에서 30일로 단축한다. 신규 개발한 대응물질에 대해선 일단 제조한 뒤 물질정보 및 시험계획서를 추후 제출할 수 있도록 한다.

산안법상 필수인 화학물질 공정안전보고서의 심사기간 역시 종전 54일(평균)에서 30일로 단축하기로 했다. 소재 등 분야의 해외 전문인력을 국내로 초청하면 우선적으로 심사하고 전자비자를 신속하게 발급해준다.

하지만 기업들은 정부의 이번 대책에 큰 점수를 주지 않고 있다. 그동안 정부와 여당이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쏟아낸 데다 새 대책 역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판단에서다.

화학업체인 A사 관계자는 “올 1월 시행된 화평법만 해도 입법 전 당정에 수차례 시정을 건의했으나 강행된 것”이라며 “이제 와서 한시 보완한다는데 진정성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B사 관계자는 “화학 관련 대기업들은 이미 상당 부분 선투자를 해놓은 상태여서 여력이 없다”며 “인허가 기간 단축 등 조치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위험물 저장시설 규제와 독성평가 심의 등 핵심 규제는 여전하다”고 했다.

C사의 한 임원은 “최근 잇따라 시행된 화평법 화관법 등 규제 때문에 사업을 접어야 할 판”이라며 “폐지 수준으로 완화해야 일본 수준의 기술 개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조재길/성수영/김재후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