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한국금거래소에 진열된 골드바.  /한경DB
사진은 한국금거래소에 진열된 골드바. /한경DB
달러와 금(金)을 비롯한 안전자산에 시중자금이 몰리고 있다. 경기가 둔화하는 데다 미·중 무역분쟁, 한·일 경제갈등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경제 주체들의 투자심리가 얼어붙은 영향으로 풀이된다.

'불안한 뭉칫돈' 金·달러로만 몰린다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거주자(개인·기업)의 달러예금 잔액은 599억달러(약 70조6580억원)로 전달보다 42억5000만달러(약 5조130억원) 늘었다. 거주자 달러예금은 내국인과 국내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외국인,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 등이 은행에 맡긴 달러예금을 말한다. 지난달 증가폭은 지난해 11월(59억3000만달러) 이후 7개월 만에 가장 컸다. 개인들까지 집중적으로 달러를 사들이면서 전체 달러예금 잔액이 불어났다. 달러예금 가운데 개인이 보유한 예금(128억1000만달러) 비중은 21.4%로 역대 두 번째로 높았다.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증폭되면서 달러를 비롯한 안전자산을 찾는 시중 부동자금이 더 늘어나고 있다고 은행 관계자들은 전했다.

골드바(금괴) 판매량도 급증했다. 국민·KEB하나·농협은행의 올해 상반기 골드바 판매액은 32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1.5% 증가했다. 5월에는 골드바 수요가 폭증해 물량이 동나면서 은행들이 판매를 중지하기도 했다. 안전자산은 물론 현금 수요도 커졌다. 현금과 머니마켓펀드(MMF), 종합자산관리계좌(CMA)를 비롯한 현금성자금은 5월 말 964조9834억원으로 올해 1월과 비교해 13조2357억원 늘었다. 주력 기업의 실적 부진으로 증시 매력이 떨어졌고 규제 여파로 부동산 투자가 얼어붙은 것도 부동자금을 키운 배경이다. 차기 한국경제학회장인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뿐 아니라 개인들까지 투자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며 “일본과의 무역분쟁 마찰음이 커졌고 부동산 규제 강화를 비롯한 경제정책에 대한 우려도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자 시중자금이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달러화와 금(金)에 몰리고 있다. 사진은 지난 8일 서울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이 달러 지폐를 세는 모습.  /한경DB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자 시중자금이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달러화와 금(金)에 몰리고 있다. 사진은 지난 8일 서울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이 달러 지폐를 세는 모습. /한경DB
'경제 먹구름' 짙어지자 주식서 돈 빼…자산가 弗·金이 좋다

경제 주체들이 위험자산에서 회수한 자금을 안전자산에 묻어두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과 일본 무역보복 등 한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대외변수가 늘면서 경제 주체들의 투자 심리가 위축된 탓이다. 대내적으론 기업들의 실적 부진으로 주식시장 매력도가 떨어진 데다 가계 자금이 몰리던 부동산 시장의 열기가 식어가고 있는 영향도 작용했다. 미·중 무역분쟁 등의 해결 가닥과 경기 회복의 뚜렷한 신호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안전자산으로 몰려가는 자금의 이동흐름은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불안한 뭉칫돈' 金·달러로만 몰린다
불안한 금융시장…얼어붙은 투자심리

올 들어 거침없이 떨어지던 원화가치는 지난달 4개월 만에 오름세로 돌아섰다. 달러당 1200원을 위협하던 원·달러 환율은 1160원대까지 밀려났다. 지난달 말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간 무역 갈등이 다소 진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진 덕분이다. 국내 경기 바닥론도 조금씩 고개를 들던 때였다. 때마침 경기동행지수도 14개월 만에 반등했다.

하지만 개인과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은 냉담했다. 오히려 이 기간을 달러 저점 매수 시기로 보고 평소보다 더 큰 폭으로 사들였다. 지난달 개인은 7억7000만달러어치를 순매수했다. 2017년 11월 이후 19개월 만에 가장 큰 규모다. 지난달 모처럼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피어났음에도 달러 등 안전자산을 늘린 것은 국내외 경기에 대한 불안감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달 들어 대내외 여건은 더 악화되고 있다. 대외적으로 미·중 무역갈등, 영국의 노딜 브렉시트(아무런 합의 없이 유럽연합 탈퇴) 등의 우려가 더 커졌고 수출 부진도 더 심화됐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접은 기업들은 설비투자를 줄였고 개인들은 위험자산 투자를 줄이고 있다”며 “일본의 무역보복을 비롯한 초대형 악재까지 급부상하면서 개인들의 안전자산 선호 추세를 부추겼다”고 말했다.

위험자산에서 자금이 빠져나오면서 갈 곳을 못 찾은 부동자금도 1000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현금과 현금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머니마켓펀드(MMF),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을 합친 부동자금은 지난 5월 말 기준 약 965조원에 달했다. 올해 1월(951조7477억원)보다 13조원 이상 늘어난 금액이다.

매력 떨어진 증시, 얼어붙은 부동산

안전자산이 불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주식을 비롯한 위험자산에서 자금이 빠졌다는 의미다. 올 들어 지난 12일까지 유가증권시장의 하루평균 거래금액은 5조1876억원이다. 지난해 하루평균 거래금액(6조5486억원)과 비교하면 20.7% 줄어들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은 올 들어 이날(15일)까지 4조4523억원어치 주식을 순매도했다. 같은 기간 기관투자가도 1조4087억원어치를 팔았다.

이처럼 투자자들이 증시에서 발을 빼고 있는 것은 국내 주식시장을 떠받치는 주력 상장사들의 실적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정보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사 추정치 평균)는 26조7450억원으로 전년 대비 54.5% 줄어들 것으로 집계됐다. SK하이닉스의 올해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3조4955억원으로 전년 대비 6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국내 주식의 상승 여력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고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리는 베트남·중국 주식에 비해 투자 매력도 떨어진다”며 “일본의 무역보복 등도 국내 주식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으로 흘러들었던 가계자금도 줄어드는 추세다. 국내 부동산 시장은 지난해 나온 정부의 9·13 부동산 대책 등으로 열기가 식은 상태다. 주거용 건물 건설투자금은 올해 1분기 23조5000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26조1000억원)보다 2조6000억원가량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김익환/정소람/고경봉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