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간 경제 갈등의 진행 양상을 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 불꽃을 튀겼던 온 미·중 무역분쟁의 데자뷰를 보는 듯합니다. 묘하게 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협상 전술’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작년 3월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상대로 주변에서 ‘설마’하던 무역전쟁을 전격 개시했습니다. 관세 부과 카드를 꺼내들기 전까지 미국이 G2의 한 축인 중국을 직접 겨냥할 것으로 내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지요.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무모하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대내외 ‘극적 효과’는 극대화됐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이달 4일 수출규제 조치에 나선 것도 1965년 한일 협정 체결 후 처음입니다. 사전 징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전격적이었기 때문에 ‘허’를 찔린 셈이 됐습니다. 우리로선 차분하게 대응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규제에 나서게 된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은 것도 공통점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을, 아베 총리는 ‘신뢰 훼손과 부적절한 사안’을 각각 보복 조치의 배경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다 ‘국가 안보’를 무역 규제 시행의 또 다른 원인으로 설명한 부분도 유사합니다. 미국은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에 대해 ‘스파이’ 행위 가능성이 있고, 이 기업 배후엔 중국 정부가 있을 것으로 의심합니다. 일본이 ‘핵무기 전용 가능성이 있는 전략물자를 한국이 북한으로 유출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 안보는 자국의 핵심 이익이어서 언제나 예민한 주제이죠. 제3국의 간섭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시차를 두고 상대방을 압박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술 역시 아베 총리가 답습하고 있는 듯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인상 품목과 세율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방법을 써 왔습니다. 협상 시한을 정해놓은 뒤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실제로 실행에 옮겼지요. 아베 총리 역시 지난 4일 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을 제한한 데 이어 추가 조치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고 사실상 공언한 상태입니다. 시행일자는 다음달 20일 전후가 될 것 같습니다.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1100여개 수입 품목이 영향을 받게 되지요.

무역 전쟁을 불사한 미국과 일본의 움직임에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미국은 글로벌 패권을 꿈꾸는 중국을, 일본으로선 제조업 선두로 치고 올라오는 한국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이투자증권이 오늘 발표한 보고서에서 “일본 규제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정보기술(IT) 경쟁에서 한국이 앞서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적 규제일 수 있다.”고 해석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배경이야 어찌됐든 현실적으로 한국은 유리한 위치가 아닙니다. 일본과는 경제 발전의 수준과 규모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죠. 미국을 상대로 잇따라 화해 제스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중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국제 무대의 현실은 엄혹하지요.

결과적으로 한일 무역 갈등은 단기간 내 풀리지 않을 것이란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한국 정부가 미국에 ‘SOS’를 치고 있으나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직접 개입하기가 껄끄러울 것 같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고립주의’를 표방해 왔고, 아베 총리와는 상당히 막역한 사이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달 하순 일본 내 참의원 선거가 끝나면 한일 간 경제 갈등이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란 시각은 지나친 낙관론일 수 있습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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