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때 뒷짐 진 정부, 이번에도 對日 전선에 기업 내세워
정치·외교 갈등을 기업 탓인냥 책임 떠넘기며 위기 내몰아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인 초청 간담회 참석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며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석종훈 청와대 중소벤처비서관,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범수 카카오 의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인 초청 간담회 참석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며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석종훈 청와대 중소벤처비서관,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범수 카카오 의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A회장은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일본의 경제보복 관련 기업인 간담회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일본 거래처로부터 부품과 소재를 수입하는 게 어려워진 마당에 자신의 발언이 노출되면 상황만 악화될 게 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정부는 이날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기업들에 ‘숙제’만 안겨줬다.

2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정부는 2017년 3월부터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보복’으로 피해를 입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수차례 간담회를 열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정치적 사안 탓에 기업들이 피해를 입고, 정부는 그 문제를 해결하자며 기업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 수십 년째 반복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치 리스크에 5대 그룹 모두 타격

中 사드에 日 경제보복…'4류 정치' 덫에 기업만 '만신창이' 됐다

한국 기업들이 ‘정치 리스크’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중국의 사드보복과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규제 등 경제보복이 대표적이다.

현대자동차는 올 상반기(1~6월) 중국에서 차량 27만6412대를 팔았다. 2014년 상반기(55만2970대)의 절반 수준이다. 사드 보복 직후 급감한 판매량을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기아자동차의 사정도 비슷하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각각 베이징 1공장, 옌청 1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게 된 이유다.

롯데그룹은 중국 사업을 접고 있다. 롯데마트는 완전히 철수했다. 롯데백화점은 중국 내 지점을 줄이고 있다.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음료는 현지 공장 매각을 추진 중이다. 삼성SDI와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 배터리 업체도 피해를 입었다. 중국 정부가 한국산 배터리가 들어간 전기자동차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따른 피해는 그 규모를 가늠하기조차 힘들다는 게 업계의 목소리다.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수적인 핵심 소재 수입이 끊길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몇 달 내 공장을 멈춰야 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이 규제 범위를 확대하면 다른 업종의 기업들도 직·간접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경제보복이 정치·외교적 사안에서 비롯됐지만 정부는 기업들만 앞세울 뿐 제대로 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잇따라 기업인들을 불러모아 대책 마련을 당부하는 ‘보여주기식 장면’만 연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제단체 고위관계자는 “한국 정부는 피해자인 기업에 ‘부품 및 소재 국산화에 힘써달라’는 주문만 쏟아내고 있다”며 “120분간 이뤄진 청와대 회동에서도 기업인들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한 채 들러리만 섰다”고 비판했다.

설익은 정책에 산업 기반 흔들

탈원전 정책도 정치가 기업의 발목을 잡은 대표 사례 중 하나로 거론된다. 정부가 원전 건설 계획(신한울 원전 3·4호기)을 폐기하는 등 탈원전 정책을 이어가자 해외 각국은 한국 기업에 원전 건설 맡기기를 꺼리기 시작했다. 두산중공업의 신규 수주는 2016년 9조534억원, 2017년 5조510억원, 지난해 4조6441억원으로 매년 줄고 있다. 이 회사는 직원 수백 명을 계열사로 내보내고, 과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유급 휴직도 시행했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시작된 근로시간 단축(주 52시간 근로제)과 최저임금 인상(2020년까지 1만원 공약)도 기업을 옥죄고 있다. 정치권이 당리당략에 따라 경제계의 절절한 하소연을 내팽개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산업안전보건법이 대표적이다. 기업들은 법안이 모호하고 원청업체에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지운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여당과 정부는 ‘산업현장의 안전사고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만 앞세웠고, 반대하던 야당은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국회 출석과 법안 통과를 맞바꾸는 정치적 거래를 했다. 경제계 관계자는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는커녕 발목만 잡는 일이 부지기수”라며 “한국 기업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정치 리스크에 골병이 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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