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18일 시작한 ‘한국경제 3000년사’ 연재가 60회째를 맞았다. 처음 약속한 대로 이번 글이 마지막이다. 내 어린 시절 주변 마을은 초가지붕이 올망졸망 모인 ‘소농사회’였다. 친구들은 거의 소농 가계의 자제들이었다. 나는 이 연재를 통해 어릴 적 그 속에서 놀았던 소농사회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 발전, 해체했는지를 추적한 셈이었다. 나는 언젠가 까마득한 옛날에 이 땅에 들어와 터를 잡은 나의 먼 조상을 찾아 이 땅의 골짜기 골짜기를 순력하였다. 그리고 많은 것을 보았으며 많은 것을 새롭게 기록했 다.

최초의 중요한 변화는 기원후 2∼4세기였다. 소규모 가족이 20명 규모의 공동취사 집단에서 독자의 취사단위로 분리되었다. 이 최초로 출현한 소규모 세대(世帶)를 가리켜 당대인들은 연(烟)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공동노동과 부세 납부를 위시한 사회·경제생활의 기초단위는 50개 연이 모인 취락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개별 취락을 지배와 수취의 기초단위로 삼았다. 국가-취락의 관계는 한국사 제1시대 1∼7세기의 기본 구조를 이루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8세기 이후 사회·경제생활의 기초단위는 취락에서 8개 연이 결합한 세대복합체(世帶複合體)로 이행했다. 722년 신라가 시행한 정전제(丁田制)라는 토지개혁이 그 중대 계기였다. 그 세대복합체를 가리켜서는 정(丁)이라 하였다. 개별 정에는 8결(結)의 토지가 지급되었는데, 정전(丁田)이라 하였다. 전국의 토지는 왕토로 규정되었으며,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뉘었다. 공전은 왕실과 중앙정부에 속한 수조지(收租地)를, 사전은 귀족과 중앙군에 분배된 수조지를 말했다. 한국사 제2시대 8∼14세기의 기본 구조는 이와 같았다. 사회는 아직 사적인 신분·계급 관계로 분화되지 않은 공동체사회였다.

농촌에 대규모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양반 신분이 들어서는 것은 한국사 제3시대 15∼19세기의 일이다. 조선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옛부터 전해진 정이 해체되고 호(戶)가 사회·경제생활의 기초단위로 성립하였다. 호는 토지와 무관한 ‘순 인적 결합’으로 소규모 세대, 곧 소농을 말했다. 조선왕조는 정을 해체한 위에 인구와 토지를 별개의 자원으로 지배했다. 전국의 토지는 몰인격의 사유재산으로 변했다. 전국의 모든 인구는 예외 없이 국가에 대해 역을 수행하는 예속적 존재로 규정됐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구와 토지에 대한 이원적 지배체제로 인해 기존 공동체사회가 크게 해체됐다. 그 대신 ‘양반-상민-노비’의 서열로 이어진 신분제사회가 성립했다. 노비는 양반 주인의 재산이었으며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었다. 노비 인구는 15∼16세기에 걸쳐 전 인구의 30∼40%로까지 팽창했다. 이런 신분제의 굴레 하에서 소농사회가 조금씩 성숙했다.

앞선 시대에 비해 제3시대 15∼19세기는 철저하게 닫힌 경제였다. 18세기 전반까지는 개발의 여지가 있어 총생산은 증가했지만, 한계생산은 벌써 하락 추세에 접어들었다. 18세기 중엽을 넘기면서는 총생산 자체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인구 과잉에다 생태(生態)가 파괴되고 무역이 위축됐기 때문이다. 1840년대 이후 조선왕조의 사회·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조선의 경제가 회복 추세로 돌아서는 것은 일본과의 무역이 활성화한 1895년부터이다.

1910년 일제가 이 땅을 그의 부속 영토로 편입했다. 이후 조선인의 완전 동화를 목적으로 근대 일본의 법과 제도가 이식됐다.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계약 자유의 원칙’에 기초해 재산권을 확립하는 민법이 공포됐다. 조선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사적 자치의 주체’로 법인되었다. 1910년대 이후 한국사는 개인이 사회·경제생활의 단위 주체가 되는 제4시대, 이른바 근대로 이행했다. 조선과 일본의 시장은 통합됐으며, 이는 조선의 수출과 일본의 투자를 촉진했다. 조선경제는 오랜 ‘맬서스 트랩’을 벗어나 근대적 경제성장을 개시했다. 1945년 일본이 철퇴한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경제성장 추세는 멈추었지만 이내 복구됐다.

1963년 이후 34년간 한국경제는 연간 9% 안팎의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성장의 주요 동력은 수출과 투자였으며, 그 점에서 일제 하 35년과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면 일제 하에서는 수동적으로 일본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경제권에 매몰됐지만, 1963년 이후는 새롭게 탄생한 국민국가의 주도로 미국을 중추로 하는 드넓은 세계시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그사이 소농사회는 1970년대까지 건재하다가 급속히 해체됐다. 소농사회가 역사적으로 축적해온 높은 수준의 ‘사회적 자본’은 고도성장을 근저에서부터 밀어 올리는 힘으로 작용했다.

모든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다. 성공은 내외의 환경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기한다. 성공에 도취해 있다가 새롭게 제기된 도전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대응에 실패할 경우, 그때부터는 실패의 역사가 시작된다. 인류사에서 수많은 종족과 국가가 명멸한 것은 이 같은 메커니즘에 의해서다. ‘한국경제 3000년사’ 연재를 종결하는 나의 마음은 긴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보다 깊은 위기감으로 우울하다. 직전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이 나라의 정신문화가 타락 일로에 접어든 지 벌써 한 세대다. 사회와 정치는 도저히 한 나라 국민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적인 두 ‘종족’으로 분열했다. 경제가 감속 성장하는 추세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기업과 사유재산을 적대시하는 정치와 문화의 풍토가 그 주범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신문화의 타락이 어떤 지경인지는 이 연재가 좋은 증거다. 지난 1년간 이 연재를 두고 무슨 생산적인 반응이 일어난 적은 없다. 나는 25년 전부터 앞서 소개한 한국사의 새로운 시대구분과 그 지표를 제시했다. 그것은 역사학의 전통적인 시대구분 방식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나는 제2시대에서 제3시대로의 이행과정에서 노비가 전 인구의 30∼40%로까지 팽창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야말로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의 개성적 전개를 규정하는 제1의 연구과제라고 소리쳐 왔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어느 역사학자도 그에 반응하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 경제가 정체와 위기의 늪에 빠졌다는 나의 주장에 무관심했다. 오히려 일본, 미국, 호주의 경제사학계가 나의 주장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20세기에 들어 한국사에서 근대가 개시되었다는 나와 동료의 주장은 국제학계에 나가면 상식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사 연구자들에겐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불온서적과 같은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나라의 역사학은 이 나라의 근대문명이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립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역사학은 아직 근대화되지 않았다. 조선 왕조의 성리학자들은 당파에 따라 교리를 달리했다. 당파를 초월해 국가 정학(正學)을 성립시켜 본 경험이 없다. 그 닫힌 정신세계가 지난 20세기를 거치면서도 돌파되지 않았다. 한국의 역사학은 그들의 선배 세대가 정립한 학설을 부정하는 제3자를 일사불란하게 배척하는 관행에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 근대화되지 못한 것은 역사학만이 아니다. 정치학과 사회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정치학은 조선시대 이래 인간들의 정치행태를 통사로 정리하고 그 특질을 이론화한 한국정치사라는 책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의 사회학은 가족, 촌락, 단체의 역사와 그 비교적 특질을 통사로 정리한 한국사회사라는 책을 쓸 능력이 없어 보인다. 그 결과 그들은 19세기까지 또는 1945년까지의 전통 정치와 사회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 위에 그들은 1945년 이후 한국 현대사를 수입 이론이나 모델로 함부로 재단해 왔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한국의 정치와 사회가 더없이 큰 고통의 몸부림을 쳤지만, 대학의 정치학과 사회학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여러분은 대학에서 생산적 논쟁이 인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라도 들은 적이 있는가. 이 나라 대학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가운데 그 정신이 죽은 상태다. 대학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거짓말과 물질주의의 저급한 문화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60회에 걸친 연재를 이 같은 비관적 전망으로 끝내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