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기업을 이끄는 천재(business genius)들을 만나 영광스럽다.” “앞으로 대미(對美) 투자를 더 확대해주길 당부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업인들에게 던진 메시지다. 30일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과 만난 자리에서다. 미국에 투자해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추가 투자를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폭탄급 청구서’를 내밀 것이란 당초 예상과 달리 한국 기업인들을 비교적 ‘부드럽게’ 압박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 기업 일일이 거명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국내 주요 그룹 총수 등 18명의 기업인과 만났다. 간담회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허창수 GS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박정원 두산 회장, 손경식 CJ 회장, 조현범 한국타이어 사장, 한성숙 네이버 대표, 박인구 동원 부회장, 허영인 SPC 회장, 박준 농심 부회장, 류진 풍산 회장, 오창화 진원무역 대표 등이 참석했다. 허영인 회장은 미국 주요 도시에 파리바게뜨 매장 78곳을 세워 2600여 명을 고용한 점을 평가받아 초청된 것으로 전해졌다.

LG에선 구광모 회장 대신 권영수 (주)LG 부회장이, 한진에선 해외 출장 중인 조원태 회장을 대신해 우기홍 대한항공 부사장이 나왔다. 미국 측에선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 등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암참) 소속 기업인 10여 명이 참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사 내내 한국 기업인들을 격려하는 데 공을 들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성과를 설명하면서 2017년부터 양국이 상호 투자를 통해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행사 도중 앞자리에 앉은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수석부회장, 최태원 회장, 손경식 회장 등을 일으켜 세워 직접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삼성과 현대차, SK, 롯데 등 한국 기업 이름을 일일이 거명한 뒤 “이들 기업이 미국에 많은 투자를 했고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했다”고 말했다.

신동빈 회장을 콕 집어 소개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워싱턴DC를 방문한 신 회장은 (미국에) 3조6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롯데월드타워는 굉장히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했다.

우려했던 ‘폭탄 발언’ 없어 ‘안도’

트럼프 대통령은 사업가 출신다웠다. 한국 기업인들을 실컷 치켜세운 뒤, 곧바로 적극적인 대미 투자 확대를 요청했다. 그는 “지금보다 (대미) 투자를 확대하기에 적절한 기회는 없다”며 “앞으로 대기업을 필두로 한국 기업들이 대미 투자를 더 적극적으로 확대해달라”고 당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이후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강조하며 지속적으로 자국에 공장을 세우라고 압박하고 있다. 한국엔 무역 불균형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했다. 삼성 SK 롯데 등 한국 기업들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지금까지 40조원 가까운 돈을 미국에 쏟아부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손경식 회장은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 미국 식품·유통 사업에 추가로 10억달러(약 1조15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깜짝 발표’를 했다.

간담회가 끝난 뒤 일부 기업인 사이에선 ‘안도’의 분위기도 감지됐다. ‘반(反)화웨이 전선’ 동참 요구 등 ‘청구서’를 날리지 않은 것에 대해선 그나마 다행이란 반응이었다. 경제계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화웨이의 5세대(5G) 이동통신 장비를 사용하는 LG유플러스와 화웨이에 메모리 반도체 등을 납품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을 대놓고 압박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미·중 무역 협상을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화웨이에 대한 제재 완화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발언 수위가 바뀐 것 같다”고 했다.

일각에선 ‘뒷말’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행사가 당초 간담회 형식으로 예상됐지만, 정작 한국 기업인들은 발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동 시간이 약 30분에 불과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의 인사말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한 미국대사관 측이 공식 행사가 오전 10시인데도 ‘한·미 경제인 미팅’이란 명분을 내걸어 한국 기업인들에게 1시간30분 전인 8시30분까지 오라고 통보한 점도 지나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장창민/박상용/안효주 기자 cmjang@hankyung.com